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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로운 피부색의 아롱다롱 무지개

 

장 소 현

극작가, 시인

 

25년 전인 1992429LA 폭동(사이구)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남가주 한인사회는 영문도 모르는 채 큰 피해를 입었지요. 흑백갈등으로 시작된 LA 폭동은 엉뚱하게도 한인사회로 번졌고, 약탈과 방화로 인해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고스란히 입었습니다. 치유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는 더 아프고 깊었습니다.

올해 25주년을 맞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얀 미국>을 꿈꾸는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 반 이민정책, 빈번하게 일어나는 인종 혐오범죄 등등때문이겠죠. 그래서 그 때의 일들을 차근차근 되짚어볼 필요를 느낍니다. 25년이나 지났으니 폭동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우리 사회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폭동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사이구의 근본 원인은 결국 인종 갈등입니다. 돌이켜보면 25년이 지났지만 미국사회의 인종문제는 거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도드라지게 드러난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상태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만일 LA 폭동 요인처럼 인종차별적 사고와 악한 행동들이 이어진다면 폭동은 재발될 수도 있다.”

1.5세 한인 재미작가 캐럴 K 박의 말입니다. 또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그는 최근, 자신이 직접 LA폭동을 전후해 겪은 미국사회 내 인종차별과 폭력,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 폭동 이후 트라우마를 겪으며 보낸 청소년기, 폭동 당시 벌어진 총격, 폭력 등을 목격하면서 형성된 인생관 등을 기록한 소설 <캐시어의 비망록: 한인, 인종주의, 폭동>을 펴냈습니다.

그는 한인의 시각에서 LA폭동 상황을 당당하게 얘기하고, 이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 책을 펴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한인의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공론화하고, 젊은 세대들에게 알리는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현실을 되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겠지요. 예술 작품을 통해 되살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겁니다. L.A.폭동은 미주 한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이었던 만큼 이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도 많이 발표되었습니다.

권순창 시인의 시집 <개들의 도시>를 비롯한 수많은 시와 <황색 천사>(이언호) 등의 소설, <민들레 아리랑>(장소현 극본, 김석만 연출)이나 <블랙 아메리카>(이자경 극본, 김유연 연출) 등의 연극, 영화 <웨스턴 애비뉴>(장길수 감독), 다큐멘터리 <사이구>(김대실 감독) 등등참으로 많은 작품이 나왔지요. 그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고원 시인의 작품들입니다.

고원(高遠) 시인은 L.A.폭동을 계기로 여러 편의 빼어난 시를 발표했습니다. L.A.폭동 직후에 쓴 <검은 눈물로 거듭나><L.A. 애가(哀歌)>, 폭동 1주기에 발표한 <빛깔이 많은 노래><줄넘기> 등이 좋은 예지요. 이 작품들은 분노의 아우성이나 생경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절제된 언어로 구원과 희망을 노래합니다. 또한 시극(詩劇)을 연상시키는 입체적 구성도 설득력과 감동을 더해 줍니다. 그래서 이 작품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코리아타운에 코리아가 탄다.

천사들이 다녀간 흔적도 없이

무너지는 무지개

색색이 탄다.

 

빚더미 가난이 타고

이십 년 고생이 타고

삼십 년 한이 타고

분하고 억울해서

타고 타고 끝없이 타느냐.

 

미움이 타고 믿음이 타고

폭력도 타고 도둑이 타고

차별도 타고 살인도 타고

선은 선해서

악은 악해서

타고 타고 끝없이 타느냐

 

아직도 멀었다. 더 타라.

차라리 모조리 타버려라.

욕심도 슬픔도

오해도 시기도 울분도

자포자기도 다 타라.

더 타라.

사람도 짐승도 다 타라.

더 타라.

-<L.A. 애가> (1) 불난리의 부분

 

시인은 타야 할 건 하나도 타지 않고/ 안 타야 할 것만 탔을 테지./ 그리고 또 탈 테지라고, 그리고 잿더미에 엎뎌서 잿가루를 먹어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인간의 재를 씹으면서/ 인간의 잿가루를 짓씹으면서/ 우리 다시 서로 눈 좀 보자./ 간절하게 눈 좀 보자.”고 호소합니다. 서로의 눈을 간절하게 보는 순간, 마음길이 열리고 용서와 화해가 시작됩니다. 꽃이 돋아나고 아리랑 고개가 솟아나고 무지개가 뜹니다.

고원 시인이 간절하게 꿈꾸며 노래한 것은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폭동 1주년에 발표한 시 <빛깔이 많은 노래><줄넘기>에 그런 마음이 진하게 담겨 있습니다.

마치 순수한 동시나 어린이 그림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들은 아름다운 빛깔의 무지개와 어린이들의 즐거운 놀이인 줄넘기를 통해 상처의 치유와 화합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소박하지만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양함의 아름다움과 놀이를 현실 극복의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지요.

시인은 일곱 가지 꽃빛깔로 서로 인사하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자고 호소합니다. 그리고 인종의 용광로라는 LA는 물감이 많아서 좋다고, 그런 빛깔로 살자고 노래합니다. 어린이 마음에서 희망을 봅니다. 그것이 시인의 꿈이요, 간절한 기도입니다.

 

저기 보세요.

저럴려고 오래 기다린 봄비가

세차게 한 번 더 왔었군요.

LA 하늘에 무지개가 떴네요.

일곱 가지 꽃빛깔이

LA 가슴을 돌고 있네요.

 

<줄임>

 

그리고 무지개도 시도 그림도

빛깔이 말을 나누는 시간에

우리 다 맑은 물을 같이 마십시다.

물은 빛깔이 없어요.

흰 옷 입고 흰 물 마시고

검은 옷이면 검은 물,

노란 옷은 노랗게 물을 마셔요.

 

LA는 물감이 많아서 좋아요.

LA에서는 빛깔이 살아요.

빛깔이 많은 노래가 잘 살아요.

저기 보세요.

지금 그런 노래를 같이 부릅시다.

많은 빛깔로 말예요.

-<빛깔이 많은 노래> 부분

 

시인은 검은 아이 흰 아이, 아시아와 라티노 아이들이 흥겨운 장단에 맞춰 줄넘기하는 풍경을 그립니다. 어린이들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같이 놀 때골치 아픈 인종 문제도 해결되고, 생존경쟁의 으르렁거림도 노래로 변할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색들이/ 리듬의 프리즘을 이루고/ 장단 흥겨운 애들이 길을 따라/ 훌훌/ 세계 너머로 줄넘기.

인종은 몰라라 같은 줄을 붙들고/ 울긋불긋 즐거운 애들은/ 구성진 율동으로 같이 놀기./ 하늘과 땅 사이/ 한자리에서 멋지게/ 줄을 넘는다.”-<줄넘기> 부분

 

고원 시인이 간절하게 꿈꾸며 노래한 그런 세상은 이루어졌는가? 아닙니다, 아직 아닙니다. 무지개처럼 모든 인종이 함께 어우러져 줄넘기하기엔 아직 멀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한인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돈 많이 벌고, 한인 정치인 몇 명 더 배출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정신 상태는 폭동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조금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더 살벌해졌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랑으로서로의 눈을 보자는 시인의 기원과는 반대로 핏발 선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그래서 시인의 시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무지개 빛깔로 노래하고 인사하고 그림 그리며, 함께 줄넘기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올 때까지.

LA폭동 25주년을 맞으며 시인의 시들이 한결 더 생생하게 가슴에 스며듭니다. 하얀 미국을 꿈꾸는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이 시를 들려주고 싶네요.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처럼 심하게 인종차별을 하는 민족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집니다. 단일민족이라는 자부심 때문일까요, 우리는 다른 인종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부터 붙이고 보지요. 왜놈, 뙤놈, 양놈우리말 안에 이런 낮춤말이 얼마나 많은지 놀랄 지경입니다. 반성합니다.

거기에다 흰색에는 굽실대고, 색깔이 진해질수록 깔보는 얄궂은 이중성까지 있으니정말 반성합니다.

고질적인 인종차별을 줄이거나 차별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일은 생각으로만 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적극적인 행동과 실천이 필요한 일이지요. 그런데, 막상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생각하면대답이 쉽지 않습니다.

아주 작더라도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부터 구체적으로 시작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이를테면 다른 인종 이웃과 마주치면 먼저 웃으며 인사하는 일, 미국사회를 좀 더 깊게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 영어공부 같은 것

얼마 전에 발표된 한 통계를 보니, 미국민이 생각하는 진짜 미국인의 필수 조건은 출생지보다 영어 소통능력이라는군요. 여론조사연구기관인 퓨리서치센터의 보고서 내용입니다. 이 조사에 참여한 미국민의 92%는 영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아는 능력을 진짜 미국인의 최우선 조건으로 꼽았답니다. 이어서 미국 전통과 관습을 공유할 줄 알아야 진짜 미국민이라는 답이 84%로 뒤를 이었습니다.

이 기사를 읽고 느끼는 바가 참 많았습니다. 저는 미국에 산지 어느덧 40년이 되었는데 영어를 잘 못합니다. 한인사회에서 한국말만 쓰며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러니 제대로 소통이 이루어질 리 없지요. 소통이 잘 안되는데 어떻게 즐겁게 어울려 살겠습니까.

코리아타운이라는 우물 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다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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