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를 영원의 시간으로…

by Valley_News posted Sep 0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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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를 영원의 시간으로

 

함석헌 선생과 그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柳永模, 1890-1981) 선생은 생애를 햇수로 셈하지 않고, 날수로 헤아린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요. 날수를 세면 하루하루가 죽었다 살아나는 것으로 여겨져 좀 더 삶에 경각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류영모 선생께서는 1918년부터 살아온 날수를 헤아리기 시작했고, 함석헌 선생도 배워서 따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숨 쉬는 것까지 숫자로 기록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류영모 선생은 33,200(91)을 사셨고, 들고 난 숨을 쉰 횟수는 약 9억 번이라고 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32,105(88)를 살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류영모 선생께서 일기에 스스로오늘 하루살이(一日一生)’로 살아가고자 한다고 적으셨다는데, 이는날마다 편견을 버리고 하루하루를 영원의 시간으로 살고자했다는 뜻으로 새겨야겠지요. 다르게는 잠자는 것과 죽음을 똑같이 보고 영원을 하루 속에서 살고, 하루를 평생으로 여기며 매일 죽는 연습을 했다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류영모 선생의 넓고 올곧은 생각을 보여주는 상징적 일화 몇 가지 함께 살펴봅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앎과 삶이 하나였던 참사람으로 일컬어집니다. 선생은 불경, 성경, 동양철학, 서양철학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동안 진리를 추구한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우리말과 글로써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불교, 노장 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고,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습니다.

모든 종교가 외형은 달라도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다석의 종교관은 시대를 앞선 종교 사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류영모의 종교다원주의가 서양보다 70년이나 앞선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그의 종교사상은 1998년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강의되기도 했습니다.

 

18903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웠고, 서울 연동교회 신자가 되어 16세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해 2년간 수학했으며,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했습니다. 이때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전파하여 남강 이승훈이 기독교에 입신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1921(31)에는 고당 조만식 선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1년간 재직했는데, 그때 함석헌이 졸업반 학생이었습니다.

이광수, 정인보와 함께 191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린 다석 선생은 1928년부터 YMCA에서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30년이 넘도록 강의를 했습니다.

 

하루 한 끼 식사

류영모는 생활에서도 성인의 삶을 실천했습니다. 51세가 되던 1941년 믿음에 깊이 들어가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뚫리는 깨달음의 체험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선생의 호인 다석(多夕)은 하루 삼시 세끼를 합해서 저녁 한 끼만 먹겠다는 뜻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은 날짜를 헤아리는 것과 일종식(하루에 한 끼만 먹음)을 하는 것 두 가지인데, 나도 처음에는 생일을 음력으로만 알 뿐이었는데 선생님이 가르쳐주었으므로 양력으로 하게 됐고, 날을 헤아리게도 됐습니다.”

 

해혼(解婚) 선언

다석은 결혼 26년이 지난 194151세에 간디처럼 아내와 해혼(부부 성관계를 그만둠)을 선언합니다.

해혼은 이혼이나 파혼과 달리 글자 그대로 혼인의 구속을 푼다는 뜻으로, 이를 통해서 아내와 헤어짐을 선언한 것이 아니라 법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참된 사랑을 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리고는, 늘 무릎을 꿇고 앉고, 얇은 널빤지에 홑이불을 깔고 누워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철저히 고행했다고 합니다. 평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거친 옷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지요.

 

사망 예정일 선포

65세가 되던 1955년에는 자신의 사망 예정일을 선포했습니다. 1956426일에 죽는다고 선언했는데물론 이보다는 훨씬 오래까지 사셨지요.

사망 예정일 선포는 자연이 만든 생물학적인 구속을 벗어나 자신의 뜻에 따라 마무리하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겠다는 의지는 오래도록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19776월에는 톨스토이처럼 객사할 요량으로 가출했다가 사흘 만에 순경에게 업혀서 집으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고 하는군요.

 

농사를 지으며 살다

다석 선생은 늘농사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라고 말했으며, 160의 단구의 몸으로 가족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짓고, 벌을 치며, 전깃불도 없이 살았다고 합니다.

노동이 없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고 본 것이지요. 그는 예수가 젊어서 목공 일을 한 것과 공자가 젊어서 목장 일을 한 것, 만년의 톨스토이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것은 모두 땀 흘리는 삶에서 진정한 철학과 공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깨닫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말 사랑

1956<노자도덕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늙은이>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 책은 노자(老子)라는 고유명사까지 우리말로 번역한 작품으로 번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평가됩니다.

<노자도덕경>을 한자어나 외래어를 완전히 배제하고 우리말로만 번역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 류영모 선생은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가면서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겁니다.

백성(百姓)이니 민()을 뜻하는씨알이라는 낱말도 그렇게 태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은 감히 흉내 낼 엄두조차 못 내겠지만, 하루하루를 헤아리는 것과 우리말 사랑은 따라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하루하루를 또박또박 정성껏 살아야할 텐데, 전혀 그러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지요.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매일 매일을 허투루 날려 보내곤 합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게 덧없이 지나갑니다. 정말로 하루하루를 또박또박 정성껏 살고 싶습니다.

그런 생각을 예술 작품 창작에 이어 보면 어떨까요? 글 한 줄 글자 하나, 그림의 구석구석, 소리 하나하나를 정성껏 또박또박옛 사람들이 그린 그림, 대가들이 만든 음악, 거장들이 연주하는 소리, 문호의 글 구석구석에서 느낄 수 있는 거룩한 정성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기본일 텐데

요새 사람들에게선 그런 우직함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남의 이야기하기에 앞서 스스로 반성합니다. 부끄럽고,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다석 선생의 말씀들

 

내친 김에 다석 선생의 가르침과 말씀을 몇 가지 음미해보도록 하지요.

다석 선생은 스님들보다 불경에 달통하고, 도교인보다 노자 장자에 도통했지만, 개종하지 않았습니다. 동서양을 모두 회통한 뒤에도 예수를 자신이 본받을 궁극의 선생이자 가장 큰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다석 선생은 일생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읽었으며, 예수를 스승이자 삶의 모범으로 삼아 본받으며 좇으려 했지만,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다석 선생은 YMCA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맡아 30년이 넘도록 강의를 했습니다. 그의 강의 중 일부는 제자들에 의해 남아 있고, 해설과 함께 나오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를 한국화하고 또 유, , 선으로 확장하여 이해한 강의들은 순우리말로 되어 있지만, 기발한 표현이 많고 함축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스도는 전체의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는 전체의 영원한 생명이지 어떤 시대, 어떤 인물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고 그를 쳐다보는 것은 예수의 몸 껍질(色身)을 보고 따르자는 게 아니라, 예수의 속알(얼나)을 따르자는 것입니다. 예수의 속알만 말고 먼저 제 마음속에 있는 속알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의 몸도 껍질이지 별수 없습니다. 예수의 혈육()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혈육입니다. 속알이 하느님과 하나인 영원한 생명입니다.”

 

신앙은 서로 다른 대로 같다.

괜히 충돌하여 남의 잘 믿는 신앙을 흔들어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은 서로 다른 대로 같습니다. 나도 16살에 입교하여 23살까지는 십자가를 부르짖는 십자가 신앙인이었습니다. 우치무라나 무교회는 정통신앙이지만, 나나 톨스토이는 비정통입니다.”

 

죽음이란 없다.

죽음이란 없습니다. 이 껍데기 몸이 죽는 거지 죽는 게 아닙니다. 죽음을 무서워하고 싫어할 까닭이 없습니다. 보통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껍데기 몸이 퍽 쓰러져서 못 일어나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이 껍데기 몸이 그렇게 되면 어떻습니까? 진리의 생명인 얼나는 영원합니다.”

 

--치의 삼독을 끊어야 참인간

사람들은 돈을 모으면 자유가 있는 줄 아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영업이나 경영이 자기 몸뚱이만을 위한 짓이라면 그것은 서로의 평등을 좀먹습니다. 경영을 하게 되면 이익을 추구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평생 동안 모으려고만 하게 될 것이니 자유와 평등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돈에 매여 사는 몸이 무슨 자유겠어요? 매인 생활은 우상 생활입니다.”

류영모의 제자이면서 <다석일기>의 저자인 한 박영호의 설명에 의하면, 탐의 결과는 부자(富者)이고, 진의 결과는 귀인(貴人)이며, 치의 결과는 미인(美人)으로, 각각 자본지상주의, 권력 지상주의, 외모 지상주의를 낳는다는 겁니다.

 

간디의 가르침

내가 예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를 얘기한다고 해서 공자를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정신이 사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간디나 톨스토이처럼 하느님 말씀의 국물을 먹고 사는 것이 좋다고 해서 그들과 비슷하게 하려는 것이 공자, 석가, 예수, 간디, 톨스토이를 추앙하는 것입니다.

간디가 누구인지,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알고 지내야 합니다. 현대 사람은 간디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합니다. 예수나 부처를 말할 때도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를 타고 가는 목숨이다

사랑은 믿음이고, 생명을 내버리는 것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 내가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한다는 뜻입니다. ()을 이루기 위해 자기 몸을 내던진다는 뜻입니다. 자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을 자유로이 한다는 것은 이 살신성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무서워하면 죽음의 종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누구에게 배워서만이 아니라 절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은 죽이고 생명은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면 뚜렷해지는 것은 영혼인 생명입니다.”

 

성령과 악령

생명은 영원한 것을 하늘의 명령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이어온 생명을 무한 중에서 잠깐 누리는 것입니다. 잠깐 꿈을 꾸는 것입니다. 내일 꿈이 깨면 다 그만입니다. 꿈 깨면 다 시원합니다. 부천(富賤)의 차()가 없이 난()은 다 같습니다. 부잣집 자식이나 대통령의 양자(養子)나 난()은 다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해야 하고, 알았으면 멸망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가야 합니다.” 

 

다석류영모.jpg

  <류영모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