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는 편지를...

by Valley_News posted Nov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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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에는 편지를...

 

장소현 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던 날…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고은 시인의 시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가을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가을에 자주 듣는 노래이지요. 설마 이런 편지를 휴대전화 문자나 카톡이나 이메일로 보내진 않겠지요.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러고 보니, 손글씨로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쓴 편지를 받아본지가 언제였던지… 까마득하네요. 하긴 뭐, 내가 안 보냈으니 못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말입니다. 

   가끔씩, 빛바랜 옛날 편지뭉치를 꺼내볼 때가 있습니다.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펼쳐서 읽어가노라면 아련하고 아득한 그리움이 밀려오지요. 컴퓨터나 기계로 쓴 글씨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사람냄새와 깊은 정(情)… 어쩌다 부모님의 글씨를 대하면 울컥하기도 하지요. 이런 감정이 아날로그 꼰대의 푸념만은 아닐 겁니다.

  아무쪼록, 이 가을이 손글씨로 정성껏 쓴 편지가 오가는 아름다운 계절이면 좋겠습니다. 그런 편지를 쓰는 시간, 받아 읽는 순간만은 마음이 두근거리며 깨끗해지지 않을까요…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 가슴을 울리는 감동적인 편지가 참 많습니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 같은 뻐근한 서간문학 말입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김민기의 노래처럼‘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베토벤의 러브레터

   불멸의 연인에게

  불멸의 연인이여, 비록 침대에 있지만 나의 생각은 당신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즐겁기도, 그리고는 슬퍼하기도 하면서 운명이 우리의 소망을 들어줄 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과 완전히 함께 살 수 있거나 전혀 함께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요, 나는 당신에게 멀리 떨어져서 방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당신의 두 팔로 날아가 내가 정말 당신과 함께 집으로 왔다고 말할 수 있고, 당신에게 감싸져 있는 나의 영혼을 영혼의 땅에 보낼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래요, 아주 불행하겠지요. 당신을 향한 나의 충성을 당신이 알기 때문에 좀 더 침착해야 할 겁니다. 다른 사람은 나의 마음을 절대로 절대로 차지할 수 없어요. 

   하느님 맙소사, 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겁니까? 그리고 비엔나에서의 나의 삶은 지금도 비참합니다. 당신의 사랑은 순식간에 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면서도 불행한 남자로 만들어 주네요. 

  내 나이가 되면 안정적이고 조용한 삶이 필요한데, 우리의 관계 안에서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내 천사, 나는 우편마차가 매일 지나간다는 말을 방금 들었어요. 그러니까 나는 편지를 그만 쓰고 당신이 빨리 편지를 받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아요. 

  진정해요, 우리 존재에 대한 차분한 생각만이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합니다. 진정해요, 나를 사랑해 줘요. 오늘, 그리고 어제... 당신을 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했습니다. 당신은 내 삶이고 내 전부입니다. 

  안녕. 오, 나를 계속 사랑해주세요. 절대로 당신이 사랑하는 가장 충복한 이 마음을 잘못 판단하지 말아주세요.

 

  영원히 당신의

  영원히 나의

  영원히 우리의...

 

  1812년 7월 7일 좋은 아침.

  보헤미아, 테플릿츠 

 

  <편집자의 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애편지 중의 하나를 고르라면, 아마도 베토벤이 불멸의 연인(Immortal love)에게 보낸 연애편지를 꼽아야할 겁니다. 이 편지는 베토벤의 사후에 발견되었고, 받는 사람이 뚜렷이 적혀 있지 않아서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렇게 뜨거운 연애편지를 쓴 베토벤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베토벤 <불멸의 편지>

   친애하는 베티나!

   왕과 군주들은 교수나 추밀관(樞密官)을 만들 수 있소. 자기들이 만들어낸 직책에 훈장을 잔뜩 내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들은 위대한 인간, 군중 사이로 치솟아 오르는 위대한 정신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오. 

   따라서 왕보다 우월한 그런 사람들은 존경받아 마땅하오. 그러니 나와 괴테 같은 사람이 함께 있으면 군주들도 우리의 위대함을 느낄 것이 틀림없소.

   어제 괴테와 함께 산책하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황실의 행렬이 지나갔다오. 우리는 멀리서 그 행렬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는데, 괴테는 내 곁에서 떠나 길가에 비켜서지 뭐겠소. 내가 말려도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을 거요. 그래서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외투 단추를 채우고는 팔짱을 끼고 법석대는 군중 속으로 들어갔소. 왕자와 중신들이 늘어선 가운데 황후께서 먼저 내게 인사를 건넸고 그 다음에야 나는 루돌프 대공을 향해 모자를 벗었소. 그들은 다 나를 알아보았소. 

   행렬이 괴테의 앞을 지날 때 그가 어떻게 하나 굉장히 궁금했지. 글쎄 그는 길가에서 모자를 손에 들고 황송한 듯 몸을 굽히고 서 있지 않겠소. 

   나는 이 일로 그를 맹렬히 비난했소.   …(하략)…

  음악가에겐 모든 것이 허용된다오. 세상에, 얼마나 그대를 사랑하는지!

  그대의 충실한 친구이며 귀먼 형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

    나는 그림을‘고향’이라고 생각한다.…… 

   벌써 늦은 시간이지만 테오 네게 편지를 쓰고 싶어졌어. 너는 여기에 없는데 난 네가 필요해.  …(중략)…

  색채는 그 자체로 무언가를 표현한다. 색채 없이 표현은 불가능하다. 반드시 색채를 사용해야 한다. 아름다운 것, 진정 아름다운 것은 옳은 것이기도 하다.   …(중략)…

  …내 변함없는 소원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는 것이란다. 나는 색채와 구성에 의한 새로운 미술, 예술적 삶에 의한 새로운 미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믿고 있어. 그렇게 믿고 그림을 그린다면, 우리가 헛된 희망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찾아올 거라고 생각한다.

  (매일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종종 내가 부자라고 생각한단다. 돈을 많이 가진 건 아니지만 나는 부자야. 왜냐하면 내 작품 속에서 나는 내가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할 수 있는 것, 나에게 영감을 주고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을 찾았기 때문이지. …(중략)…

   <1874년 1월>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 

  화가들 중에는 좋지 않을 일은 결코 하지 않고, 나쁜 일은 결코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이 있듯. 

   <1882년 7월21일>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으로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이 고뇌하고 있다고,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1884년 10월>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1885년>   진정한 화가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붓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붓이 그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1888년 6월>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화가 박수근의 구혼 편지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 편지를 보내오니 용서하시고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중략)… 

  나는 춘천과 서울로 다니면서 그림공부를 독학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섯번 선전에 입선을 했습니다. 선전(鮮展)에 처음 처녀 입선한 것은 내가 18세 때였습니다.   …(중략)…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론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나는 나 혼자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나의 이 숨김없는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도 당신의 심정을 솔직히 적어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