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즈음 미국에 이민 온 후 직장 생활을 할 때, 제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는 걸 아는 백인 여자 동료가, 저에게 어떤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곡명과 누가 작곡한 곡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저에게도 낯설지 않은 멜로디였지만, 나 역시 무슨 곡인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이 여자 동료를 마주칠 때 매번 제게 묻지 않았지만 곡명을 묻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던 중, Beverly Hills에 있는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West Hollywood에 있는 Tower Record에 들러 점원에게 멜로디를 들려주어 이 곡을 샀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들었던 멜로디는 세 번째 곡인“On the Trail”이었습니다. Grand Canyon 바닥에 흐르고 있는 콜로라도 강까지 내려가기 위해 나귀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내려가는 모습을 감탄이 나게 잘 묘사한 곡이었습니다.
그로페는(1892-1972)는 뉴욕시에서 4대에 걸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작곡가이면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비롯해 바이올린, 비올라, 바리톤, 호른, 알토 호른, 코넷과 같은 다양한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했으며, 이러한 경력은 그가 편곡과 작곡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로페가 폴 화이트먼 관현악단에서 재즈 피아노 연주자로서, 주 편곡자로서 수백 개의 곡을 편곡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관현악곡 작곡이 서툴렀던 조지 거쉬인은, 피아노곡으로 작곡한 “Rhapsody in Blue”를 그로페에게 관현악곡으로 편곡을 의뢰했고, 이 관현악곡이 큰 찬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곡으로 인해 거쉬인 뿐만 아니라 그로페도 주목을 받게 되어 미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로페는 애리조나에서 무명의 피아니스트로 떠돌 때, 웅대한 그랜드 캐니언을 본 뒤로 20여 년간 한 번도 잊지 않고 구상하고 있어서, 결국 화가처럼 색채감 있는 음악을 그려낼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곡은 1931년에 완성되었고, 같은 해 11월 시카고에서 초연되었습니다.
다섯 곡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모음곡은 광활한 그랜드 캐니언을 당나귀를 타고 하루 동안 여행하는 곡입니다.
첫 번째 곡은‘Sunrise 해돋이’로 해가 돋는 그랜드 캐니언의 새벽을 아주 멋지게 그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Painted Desert 붉은 사막’으로 그랜드 캐니언의 남쪽 사막이 햇빛을 받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풍경을 그렸습니다.
세 번째는‘On the trail 산길에서’로 다섯 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이며 단독으로도 자주 연주됩니다.
지금도 당나귀를 타고 종일 오르내려야 하는데 나귀를 타고 뒤뚱뒤뚱 내려가는 모습을 조금은 익살스럽게 잘 표현하였으며, 이어지는 여정을 즐겁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Sunset 해 질 녘’으로 목동의 뿔피리가 골짜기에 메아리치면서 그랜드 캐니언의 고요한 황혼이 시작됩니다.
다섯 번째 마지막 곡으로‘Cloudburst 소나기’인데 변화무쌍한 그랜드 캐니언의 날씨를 묘사했습니다.
순식간에 검은 구름이 모이고 곧 소낙비가 천둥 번개와 함께 내리고 그리고는 언제 그랬느냐며 고요한 협곡에 밝은 햇살과 선명한 무지개가 걸리는 아름다운 그랜드 캐니언을 잘 묘사하였습니다.
1983년 5월 초순에 세계인의 첫 번째 여행지로 뽑힌 그랜드 캐니언, 남쪽 빌리지를 가기 위해 Kanab 에서 Page를 지나 64번 동쪽으로 들어서자마자 곧 안개가 끼었는데 (사실은 구름 속이었음), 앞은 캄캄히 보이지 않고 바로 앞길에서 우레 소리와 함께 여러 개의 번개가 여러 번 내리쳤습니다. 우리는 모두 무서움에 떨며 얼마나 기도를 했었는지…
그런데, 15분을 달려 빌리지 근처에 오니, 찬란한 석양빛과 함께 소나기 뒤의 너무나도 선명한 아름다운 무지개가 우리 일행을 반겼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니 밤사이에 하얀 눈이 협곡을 덮었습니다. 그러나 식당에서 늦은 브런치를 먹고 밖을 나오니 그 많던 눈은 온대간대 없이 다 녹아 없어졌고 화창한 봄날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서서 관람하는 홀인지 아니면 극장인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큰 화면으로 그랜드 캐니언의 풍경을 그로페의 음악과 함께 온몸으로 감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연주하는 곳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 <*> 문의 chesonghw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