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이제 남가주에는 11월 말이 되어야 가을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가을이 되면 늘 버릇처럼 브람스 음악을 자주 듣습니다. 클라리넷 5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과 함께 4편의 교향곡은, 아침 저녁 스산한 날씨와 함께 낙엽들이 바람에 날리어 차운 땅바닥을 훑고 다니는 깊은 가을이 되어야, 브람스의 마음을 더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독일의 음울하고 습한 도시,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작곡가 브람스의 음악은 저에게 가을, 고독, 클라라를 떠오르게 합니다. 과묵하고, 엄격했던 브람스는, 등 뒤에서 다가오는 거인, 베토벤의 발소리를 들으며, 베토벤이 남긴 위대한 교향곡들에 필적한 만한 작품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인해, 21년이 걸려 첫 번째 교향곡 1번을 작곡했습니다. 당시에 베토벤을 의식했던 음악가는 브람스만이 아니었습니다. 베를리오즈, 바그너, 브람스 등 이후의 수많은 음악가가 베토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직간접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럽 음악계는 바그너 추종 시대였습니다. 바그너의 악극들로 인해 고전주의 형식의 붕괴가 가속화되어가는 시점에서, 브람스 교향곡 1번의 등장으로 인해, 19세기는 낭만주의와 고전주의가 공존하는 시대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은 단순히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이자 걸작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19세기 음악사에 큰 획을 긋는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자칫 구시대의 유물이 될뻔한 교향곡이, 브람스 이후에도 많은 음악가에게 동기 부여가 되었고, 음악사에는 이 시기를 신고전주의라고 구분 짓기도 한다고 전해집니다.
브람스가 교향곡을 쓰기로 한 것은 1855년 22살 때 그의 스승인 슈만의 “만프레드 서곡”을 듣고 난 후였지만, 교향곡 1번은 21년이 지난 1876년이 되어서야 완성되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휘자인 한스 폰 뷜러는 “이제야 베토벤 교향곡 10번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라고 극찬하였다 전해집니다.
1악장 서두부터 강렬한 팀파니의 연타를 시작으로, 베토벤의 넓이와 깊이를 따라잡으려는 21년이 걸린 브람스의 각고가 느껴집니다. 우수에 어린 2악장에서 오보에가 연주하는 선율, 평화로운 목가풍에 간간이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3악장에서 호른으로 이어지는 선율이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마지막 4악장에서 느리고 비장한 서주에 이어 현의 피치카토가 주도합니다. 긴장감이 점차 상승하다가 관악기와 팀파니가 어울리면서 폭발하지요. 그러다가 다시 목관이 서정적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호른이 그 유명한 알프스 풍 선율을 연주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이올린이 주도하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 악장을 연상시키는 주제가 연주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17살이 많았던 가정에서 가난에 허덕였던 불우한 성장 과정과, 14살 연상의 클라라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극복하고 엄격과 인내로 살았던 브람스는, 모차르트, 베토벤과는 달리 타고난 천재성보다, 음악을 향한 열정과 집념을 불태우기 위한 브람스의 고뇌가 그의 음악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브람스 교향곡 1번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절제된 깊은 내면의 세계를 음향으로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브람스에게만 느낄 수 있는 서정적이며 중후한 감정으로 인해, 이 가을에 많은 사람이 위로받는 것 같습니다.
1896년 클라라가 77세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녀 간의 사랑 대신 자신을 절제하며 끝까지 그녀 곁에서 지켜주었던 브람스. 그러나 클라라가 떠난 1년 후, 브람스는 그녀를 따라가듯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브람스의 4개의 교향곡에서도, 클라라를 향한 못다 한 애틋한 사랑이 눈물겹도록 느껴짐은 저만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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