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5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아주 오래전이었다. 서울에 사는 손위 시누가 이곳을 방문해, 남편과 함께 백화점에 갔었다. 삼층으로 막 들어서는데 코트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늘씬한 마네킹이 입고 있는 빨간 코트였다. 그녀도 시선이 끌렸는지 얼른 다가가서는 손으로 코트 자락을 만져보았다. 감색이나 깜장색을 즐겨 입는 시누이에게 빨강은 당치도 않는 색깔인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냥 지나치는 나를 그녀가 붙들었다. 한번 입어보라는 것이다.

  사실 이곳 로스앤젤레스의 겨울은 코트가 없어도 별 문제가 없다. 더구나 빨강은 내게도 거리가 먼 색깔이다. 아주 짙고도 밝은 빨간색이기에 더 그랬다. 사양하는 내게 시누이는 부득부득 입어보라고 했다. 살 마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마지못해 입으면서 가격표를 보니 값이 이만저만 비싼 게 아니었다. 그녀는 예쁘다고 탄성을 질렀다. 내가 봐도 아주 괜찮았다. 내 눈높이에 맞는 로스나 마샬 수준의 가격이었다면 좋았으련만, 그러나 가격은 그 몇 배가 넘었다. 나는 빨간색을 싫어한다는 이유를 붙여 완강히 거절했다.

  그랬더니 벽에 걸려 있는 초록색 코트를 사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뭔가 내게 사주고 싶어 하는 시누이의 마음을 헤아리니 고마워 가슴이 뭉클했다. 할 수 없이 또 입어보았다. 그것도 잘 어울렸다. 화끈한 그녀는 두 개 다 사라면서 돈 낼 차비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여기는 겨울에도 날씨가 춥지 않아 코트가 필요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또 거절했다. 

  옆에 있던 남편이 내 허리를 꾹꾹 찔렀다.‘가만있어라.’는 신호다. 나는 남편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이 그의 속내를 환히 안다.‘누이는 부자니까 받아도 괜찮아.’하는 남편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누구에게나 돈의 가치는 똑같다. 능력의 한계가 다르다 뿐이지, 코트 값이 나한테 큰돈이면 시누이에게도 큰돈인 것이다. 남편을 생각하는 시누이의 마음이 모성애만큼이나 각별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미안해서라도 이번만은 정말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얌체 같아. 누나한테 맨날 넙죽넙죽 받기만 하고.’ 

  ‘누나니깐 그렇지.’

  그는 실실 웃고 나는 찡그리고, 둘은 무언의 표정과 행동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눈치 빠른 시누이가 남편과 한마음이 되어 말했다.  

  “왜 자꾸 빨간색을 싫어한다 그러니?  빨간색이 너무 잘 어울리는데... 네 신랑 좋아서 싱글벙글하는 거 좀 봐라 얘...”  

  그리고 진짜로 기분 나쁜 말투로 뒷말을 이었다. 짜증이 잔뜩 난 듯, 얼굴까지 찡그렸다.

  “사주면 그냥 고맙게 받으면 되는 거야. 사양하는 것도 지나치면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든다구. 자꾸 그러면 정말 안 사줘. 집에 가서 후회하지 말고.”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하나만 사기로 결정을 했는데, 시누이도 남편도 백화점 직원도 초록색보다는 빨간색이 내게 더 잘 어울린다고 했다. 색깔로 따지자면 나는 빨강보다는 초록을 훨씬 더 좋아한다. 

  지금, 나는 그 코트를 즐겨 입으면서 그때 둘 중에서 빨간 코트를 선택한 것을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한다. 

  유행이 바뀌어도 몇 번을 바뀌었을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빨간 코트를 애용한다. 이 나이에는 걸맞지 않은 색깔인데도 아직도“괜찮다”는 말을 듣는다. 색깔도 디자인도 지금에 와서야 더 내 마음에 든다. 

  길이도 무릎 아래로 한참 내려왔으나 치렁치렁한 긴 느낌도 들지 않는다. 겨울 코트를 자칫 잘못 입었다간 마치 드럼통이 굴러가듯 짜리몽땅하게 보이기 십상인 내 작은 몸매다. 한데 이 코트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아주 늘씬하게 만들어 준다. 화장을 정성들여 하고 머리를 잘 손질한 후, 까만 구두와 핸드백으로 조화를 이루어 거울 앞에 서면 나는 그만 자화자찬에 빠진다. 어떤 땐, 내 몰골이 너무 흉측해 거울이 보기조차 싫어 일부러 외면을 하면서도, 또 이런 때도 있어 위로가 된다.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놀란 것 중의 하나가 할머니들이 립스틱을 빨갛게 칠하고 빨간 옷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상하지가 않고 아주 보기 좋았다. 이제 나도 미국 할머니가 돼버렸나 보다.

  나이 탓인지 세월이 갈수록 겨울이 점점 더 추워진다. 그래서 나는 이 코트를 즐겨 입는다. 서랍 한쪽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내의를 꺼내 입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예전에 어머니가 사주신 한국산 내의들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추위를 타지 않았다. 이십대 시절에는 그 추운 겨울에도 스타킹을 신지 않은 맨발에 하이힐을 신고 서울의 거리를 활보했다. 그때는 빨간 코트가 아닌 까만 코트였다. 어머니는 늘 내게 밝고 화려한 색깔의 옷을 권했지만 나는 마다했고, 빨간색은 더더욱 질색을 했다.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빨간색을 좀 입지... 왜 나는 그 고집을 피웠을까?  

  지금은 이렇게 빨간색을 즐겨 입으면서 말이다. 어머니가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그러나 빨간 코트 입은 내 모습을 아무리 보여드리고 싶어도 이제는 어머니가 안 계신다. 

  코트를 살 당시, 시누이를 보며 나는 어머니 생각을 했었다. 빨간색을 고집하는 것이 둘이 닮아서였다. 무조건 사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도.

  나는 오늘도 빨간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선다. 폭신한 코트에 두 분의 사랑이 함께 흐르고 있어 내 몸은 더욱더 따뜻해진다. <*> 


  1. No Image

    속 터진 만두 이야기

    60년대 겨울, 서울 인왕산 자락엔 세 칸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그날그날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빈촌 어귀에 길갓집 툇마루 앞에 찜솥을 걸어 놓고 만두 쪄서 파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습니다. 쪄낸 만두는 솥뚜껑 위에 얹...
    Date2022.03.31 ByValley_News
    Read More
  2. No Image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김 순 진 <교육학 박사>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What is learned in cradle lasts till the grave. The habit of our youth accompany us in our old age. Who so learns young, forgets not when he is old. Custom (habit) is a second nature. 과장된 감이 있는 속담이지만, 3...
    Date2021.12.01 ByValley_News
    Read More
  3. No Image

    성현도 시대를 따르랬다 -교육한박사 김순진-

    성현도 시대를 따르랬다. One should be compliant with the times. It is ill striving against the stream. “성현”은 사전에“성인과 현인”이라고 나와 있는데, 성인과 현인이라면, 평범한 보통사람들보다 덕이 높고 지혜가 출중한 ...
    Date2022.03.03 ByValley_News
    Read More
  4. No Image

    생명력과 면역력 -이기정-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면서 두 가지 힘을 겸하여 주셨다. 바로 생명력과 면역력이다. 생명력은 생명 활동을 위한 힘이고 면역력은 생명을 병마로부터 지키기 위한 힘이다. 사람이 생명력이 아무리 강해도 면역력이 없으면 생명을 계속 유지할 수가 없...
    Date2020.11.23 ByValley_News
    Read More
  5. 새해특집 : 호랑이는 우리의 정겨운 친구

    <호랑이는 우리의 정겨운 친구> 2022년 새해는 임인(壬寅)년 호랑이 해다. 호랑이 중에서도 검은 호랑이의 해라고 한다. 띠동물인 호랑이에 대해 알아본다. 한민족과 친숙한 호랑이 호랑이는 무서운 맹수요, 사나운 산 중의 왕이라고 열려져 있지만, 우리 한국...
    Date2022.01.06 ByValley_News
    Read More
  6. No Image

    삶의 유산 - 박 복 수 <시인, 문인> -

    우리들의 생활 중에서 즐거운 일, 슬픈 일, 또는 사랑하는 일, 미워하는 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의 뒤섞임. 그중에는 옳은 인생의 가치를 부여하기도 하고, 허무한 삶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혹은 죄악을 낳기도 하며 결국에는 누구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
    Date2021.04.28 ByValley_News
    Read More
  7. No Image

    산책길의 풍경- 윤금숙 소설가, 포터랜치 거주

    사계절 중에 봄을 가장 좋아하는 나는 이월로 접어들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비도 며칠 왔으니 이제 산책로에도 이름 모를 야생화가 필 것이며, 나무들도 더 싱싱해지겠지… 우리 동네에는 요샛말로‘백만 불짜리 산책로’가 있...
    Date2020.01.27 ByValley_News
    Read More
  8. No Image

    뺨을 맞아도 은가락지 낀 손에 맞는 것이 낫다 -김 순 진 교육학 박사-

    뺨을 맞아도 은가락지 낀 손에 맞는 것이 낫다. Everybody loves a lord. It's good to be related to silver. 속담 중에는 읽고 나서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들이 있는데, 이 속담이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남에게 빰을 맞는다는 것은, 가장 큰 모욕을 ...
    Date2022.04.29 ByValley_News
    Read More
  9. 빨간 코트 -김 영강 소설가-

    아주 오래전이었다. 서울에 사는 손위 시누가 이곳을 방문해, 남편과 함께 백화점에 갔었다. 삼층으로 막 들어서는데 코트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늘씬한 마네킹이 입고 있는 빨간 코트였다. 그녀도 시선이 끌렸는지 얼른 다가가서는 손으로 코트 자락을...
    Date2020.04.09 ByValley_News
    Read More
  10. No Image

    백신(vaccine)은 소(牛)에서 유래한 말 -종양방사선 전문의 류 모니카 -

    요즘처럼 일반인들이 전염병과 백신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 또 들은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코비드-19 사태 때문일 것이다. 코비드-19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vaccine)이 곧 성공적으로 만들어지고 이르면 올가을에는 공급될 것으로 조심스레 기대하고 있다. 여...
    Date2020.10.02 ByValley_News
    Read More
  11. 백범선생 명언 모음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이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가 강...
    Date2021.05.25 ByValley_News
    Read More
  12. 백범 김구 선생의 말씀

    김구 선생의 육성을 들으며,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락함과 평안함이 조국의 평화와 독립을 위해 싸워주신 분들의 은혜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되새겨봅니다. ★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Date2022.10.31 ByValley_News
    Read More
  13. No Image

    밥상머리 교육과 사회정의 실현 -류 모니카(종양방사선 전문의 ,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

    코비드-19 전염을 방지하기 위한 활동 감금 정도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오랜만에 어제 작은딸네 식구가 다녀갔다. 뒷마당에서‘사회적 거리 두기’에 준해서 떨어져 앉아 이른 저녁을 먹었다. 딸은 한국토종이고 사위는 백인이다. 이 딸네 부부는 ...
    Date2020.06.24 ByValley_News
    Read More
  14. No Image

    바람이 부네요 -조성환 수필가, 시조시인-

    바람이 부네요/ 춥진 않은가요/ 밤 깊어 문득 그대 얼굴이 떠올라… 창가에 음력 8월 보름달을 옆에 걸어 두고 <바람이 부네요> 노래를 듣는다. 지난여름 일흔일곱으로 작고한 한국 재즈계의 대모 박성연 씨의 노년에 취입한 허스키한 목소리. 소리는 ...
    Date2020.10.31 ByValley_News
    Read More
  15. No Image

    미주 문인들이 뽑은 아름다운 우리말

    남가주의 문인 몇 분에게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10개>를 가려 뽑아서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응답해준 문인들의 대부분은 아름다운 우리말이 너무 많아서 10개만 뽑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미주 문인들이 가려 뽑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소개한다. (원고 ...
    Date2021.01.04 ByValley_News
    Read More
  16. No Image

    물에서 배우는 인생의 교훈 <노자 도덕경> 제8장 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은 우리 삶에 많은 교훈을 준다. 물 흐르듯 순리대로 살라는 가르침 같은 것... 예를 들어 법(法)이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물(水) 흐르는(去) 대로라는 뜻이다. 물 흐르는 것처럼 사는 것이 곧 법이라는 말이다. 가장 유명한 것이 아마도 <노자 도덕경> 제8...
    Date2022.06.30 ByValley_News
    Read More
  17. 맹노인의 눈물 -수필가 이진용-

    효도 효(孝)자는 자식이 노인을 업고 있는 형상이다. 孝자를 접할 때마다 이웃집에 살던 맹노인이 떠올라 가슴이 아파진다. 그는 1980년대 초 여동생의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오게 되었다. 그에게는 아들만 삼 형제가 있는데 큰아들은 중학교 2년생, 두 아들은...
    Date2023.08.31 ByValley_News
    Read More
  18. 말씀 한 마디- 카잘스가 말하는 평화

    “나는 카탈로니아 사람입니다. 오늘날은 스페인의 한 지방입니다만, 카탈로니아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였습니다. 나는 카탈로니아의 짤막한 민요 한 곡을 연주하겠습니다. 나는 이 곡을 14년간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꼭 연주...
    Date2023.02.26 ByValley_News
    Read More
  19. 마지막 미역국 -행복이 블로그 <행복 충전소>에서 -

    나는 뇌종양 말기 환자입니다. 날마다 고통에 시달리는 나의 모습은 거의 발악 수준입니다. 이젠 방사선 치료조차 의미가 없어지고 죽는 날이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냄새도, 미각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나를 위해 내 앞에서...
    Date2022.03.03 ByValley_News
    Read More
  20. 된장국 -시인 나태주 -

    된장국 어머님, 갑자기 날씨 쌀쌀해진 요즘 며칠 아내가 끓여주는 뜨뜻한 시래기 된장국 먹으니 어머님 생각납니다 고향의 그 나날이 비어가는 들판이, 길 모퉁이가, 언덕이, 당신의 손등처럼 까칠해져가는 고향의 나무들이 눈에 밟힙니다 고추밭과 채전밭이,...
    Date2022.12.30 ByValley_News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Nex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