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전염병으로 잔뜩 움츠려 지내고 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염, 가뭄, 산불, 홍수… 지구가 온통 몸살을 앓으며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것도 지구 곳곳에서 매번 새로운 기록을 세우며 엄청난 피해를 기록하고 있으니, 참으로 불안합니다.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재난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 짐작조차 어렵습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모두에게 돌아오는데 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날이 갈수록 사납고 거칠어지는 현상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총질이지요. 총격사고 소식이 하루도 빠짐없이 들려옵니다. 걸핏하면 터지는 총격사고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미국의 수정헌법 2조는 무기를 소유하거나 휴대하는 국민의 권리가 침해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총기 소유를 보장한 것이죠. 총기 구매도 쉽지요. 과연 총으로 세운 나라답습니다. 그러니까, 이 수정헌법 2조가 다시 수정되지 않는 한 비극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대통령이 강력한 총기 규제안을 내놓기는 하지만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 들어 유난히 총격사고가 늘어나며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유에 대해 사회학자나 전문가들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우선 총기 판매량이 늘어난 것이 가장 큰 원인인데, 지난해 유례없는 여러 불확실성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인종차별 범죄 등 다양한 불안감이 총기 구매를 부채질했다는 설명이죠.
“코로나19는 사회 구성 인간의 신뢰를 붕괴시켰다. 감염 공포에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됐다. 이전까지 커뮤니티가 공유해온 상식과 규범도 무너졌다. 이웃마저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와 내 가정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메릴랜드대학의 릴리아나 메이슨 정치학 교수의 진단)
그리고, 코로나19로 자택 격리가 되면서 범인들이 범행을 계획할 시간이 충분했다는 점도 대형 총격사고의 원인으로 꼽힙니다. 팬데믹은 총격범들에게 총과 탄환을 구매하고 총격을 계획할 충분한 시간을 준 셈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의 서부 영화식 흑백논리
물론 그밖에도 많은 원인이 있겠죠. 미국의 문화도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일 수도 있을 겁니다. 특히 서부영화, 전쟁영화, 범죄영화 등… 어떤 문제가 생기면 총으로 해결하려는 태도,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멋진 총잡이들…
그런 점에서, 헐리웃 서부영화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런 영화를 보면서 자랐지요. 존 웨인, 게리 쿠퍼, 알란 라드, 헨리 폰다, 버트 랑카스터와 커크 더글러스,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런 스타들의 총 다루는 솜씨에 열광하고 박수를 치며 자랐습니다. 그런 영화들이 미국 사람들의 마음에 심은 것은 무엇일까요? 총 빨리 뽑는 놈이 정의라는 건가요?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미국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서부 영화식의 흑백논리인 것 같습니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그렇습니다.
좋은 서부와 나쁜 서부가 싸워서, 결국은 좋은 서부가 이겨야 한다. 그리고 미국은 언제나 좋은 서부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미국은 세계 평화를 지키는 보안관이다. 따라서 늘 이겨야 한다. 지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정의다!
실제로 미국사람들은 이렇게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 서부 영화를 감상하는 미국 관객들은 좋은 서부가 멋지게 이기지 않으면 영화가 끝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이런 사고방식이 개인들에게도 전염돼서, 문제는 총으로 해결한다, 나는 항상 옳고 정의의 편이다, 따라서 나는 항상 이겨야 한다, 지면 안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과연 옳은 생각인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헐리웃 영화의 검은 그림자
코카콜라, 햄버거, 헐리웃 영화, 팝송… 미국을 상징하는 낱말들이죠. 이 상징들이 세계를 뒤덮고 있고, 거의 모든 인류가 그 흐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예외가 아니지요.
이 상징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역시 헐리웃 영화일 겁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엄청난 돈을 긁어모으면서, 동시에 막강한 문화적 영향력까지 휘두릅니다. 우리의 삶을 곰곰히 되살펴보면 너무나도 많은 부분이 미국영화의 영향력에 젖어 있고, 거기에 길들여져 있음을 깨닫고 새삼 놀라게 됩니다.
안정효씨가 쓴 소설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에 나오는 장면들이 결코 낯설지 않아요. 우리의 중요한 시절 미국이라는 나라를 인식하는 중요한 창구 중의 하나가 바로 헐리웃 영화들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사실은 그 허상들이 미국을 제대로 아는데 어지간히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영화와 현실은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죠.
헐리웃 액션 영화의 기본 틀거리는 간단히 말해서 <좋은 서부>와 <나쁜 서부>의 단순명료한 흑백논리입니다. 선과 악이 총으로 싸워, 결국은 선이 이기고, 정의가 확립된다는 단순구조의 영웅담이 서부영화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겁니다.
나쁜 서부들이 기승을 부리는 마을에 홀연히 좋은 서부가 나타납니다. 정의감과 희생정신의 상징인 좋은 서부는 목숨을 거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쁜 서부와 맞서서 용감하게 싸우지요. 온갖 아슬아슬한 우여곡절 끝에 나쁜 서부를 물리치고, 마을에는 평화가 돌아옵니다. 자기 일을 마친 좋은 서부는 사랑을 뒤로 하고 표표히 사라집니다.
또 한 가지의 큰 줄기는 인디언을 무자비하게 토벌하는 이야기들이지요.
이런 기둥 줄거리 사이사이에 사랑 이야기가 끼어들고, 이런 저런 에피소드가 얽히며 재미를 만들어 갑니다. 그 무대가 서부에서 세계대전, 월남전, 첩보전, 우주공간 등으로 바뀌었을 뿐 기본 틀거리에는 큰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주연한 <용서 받지 못한 자>라는 서부영화가 화제를 모은 일이 있었는데, 화제가 된 이유는 좋은 서부를 영웅으로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 정도로 헐리웃 영화의 기본 틀거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헐리웃의 오락물은 무엇보다도 강력하고 충실하게 미국의 사상과 생각을 주입시키고 있고, 관객은 영화의 재미만을 쫓으며 무의식중에 세뇌 당하고 만다.” (김현아 지음 <나는 미국이 싫다> 중에서)
문제는 미국은 언제나 <좋은 서부>이어야 하고, 언제나 <승리자>로 그려져야 한다는 오만한 독선입니다. 미국은 항상 정의의 화신이고, 세계 평화를 지키는 보안관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 바로 헐리웃 영화인 겁니다. 세계가 미국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요. 이 메시지의 핵심은 백인 우월주의, 미국 중심의 문화제국주의… 등 독소적인 요소들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백인과 나를 동일시하는 터무니없는 착각도 문제이고, 근거 없는 피해의식이나 열등감에 빠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안타깝게도 어렸을 때부터 헐리웃 영화를 보며 자라온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식 논리에 마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디언이나 월남 사람 또는 일본인이 백인의 총에 쓰러지는 장면을 보면 우리는 백인 주인공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도록 길들여져 왔습니다. <좋은 서부=백인>이라는 공식에 물들어버린 것이죠. 과연 어떤 것이 정의요 진리인가 따위의 생각을 할 겨를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던 겁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헐리웃 영화가 추구하는 것은 흥행, 즉 돈입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재미있고 관객을 끌어들이는 자극과 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술성이나 감동보다 이것이 먼저지요. 예술성은 그럴듯하게 보이려는 포장에 불과하고, 현실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주인공의 총에서는 무진장으로 총알이 나오고 한 발에 여러 명이 죽는 괴력을 발휘하고, 주인공의 가벼운 발길질에도 여러 명의 적이 비명을 싸지르며 나자빠져 죽지만, 주인공은 여러 발의 총탄을 맞고도 늠름하게 살아남거나, 주어진 대사를 멋있게 다 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품에 안겨 장렬하게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이 멋진 주인공은 거의 반드시 백인이어야 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비현실성을 따져봐야 따지는 사람만 바보가 되고 맙니다. 이런 식의 일방적 오만함에 길들여지는 동안 우리의 정신은 속절없이 녹슬어 갑니다. 입맛만을 위해 햄버거와 콜라를 즐기는 동안 우리의 건강이 망가지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하게 우리의 정신이 동맥경화증을 일으키는 것이죠.
멋있게 죽이기
죽음은 예술작품에 있어서나, 현실 생활에 있어서나 인간의 가장 큰 명제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가장 큰 범죄인 겁니다.
그런데 헐리웃의 폭력영화에서는 당연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아슬아슬하고 재미있고 멋있게 죽일 것인가에만 쏠려 있어요. <생명 경시 풍조> 어쩌구 하며 시비를 거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죠.
그런 영화를 보면서 자라 그런 영화에 중독된 미국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우선 총을 들고 나서고, 서부영화의 멋진 총잡이와 자신을 동일시하다보니,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일이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헐리웃의 총질 영화가 없었으면 세상이 평화로웠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