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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말>

  10월9일은 한글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에서도 10월9일을 한글날(Hangul Day)로 공식 지정해 기리고 있는데, 이런 자랑스러운 일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해매다 한글날이 되면, 세종대왕님 뵙기가 매우 황송해진다. 서울 광화문 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뒤쪽에 앉아계신 세종대왕을 사진으로라도 뵈오면 엎드려 머리 조아리고 용서를 빌고 싶어진다.

  지금 우리말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망가지고 있다. 참혹할 지경이다.

  온라인 소통이 일반화되면서 말이 요상하게 짧아지고 정체불명의 신조어가 출몰하고, 일상생활에서 영어가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고,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분들을 비롯한 정치인이 막말, 욕지거리, 비속어, 새빨간 거짓말을 태연하게 쏟아내는 판이니… 누구를 탓하랴?

  우리의 정신과 의식구조 깊숙이 파고들어 자리잡은 문화식민주의라는 고약한 바이러스를 탓할 수밖에…

 

 

우리가 해외에 나와 살면서도 우리말을 지키려 애쓰는 까닭은 그 안에 우리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말과 글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정서를 담는 그릇인 것입니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키려는 노력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사투리 지키기, 속담 다시 읽기, 그리고 좋은 문학작품 읽기, 가능하다면 직접 글쓰기 등등 많습니다.      

 

  속담은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것은 잘 몰라도 우리나라의 속담은 무척 재미있어요. 짧은 말 속에 우리 겨레의 기질과 가치관, 인생관 등이 농축되어 있어서 음미할수록 흥미롭기 그지없습니다. 

  특히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 속담에 나타나는 이중성 또는 이중구조입니다. 서로 반대되는 속담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면성이 무척 흥미롭지요. 예를 들어, <이왕이면 다홍치마> <보기 좋은 떡이 맛있다>라고 해놓고는 <빛 좋은 개살구>요 <미인박명>이라고 받아치는 식입니다. 

  <보기 좋은 떡이 맛있다>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낄낄 웃지요.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는 둘 다 놓친다>고 경계하면서도 속으로는 <일석이조>나 <꿩 먹고 알도 먹기>를 기대합니다. 참으로 묘한 모순이지요. 

  <올라가질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윽박지르고 <누울 자리보고 다리 뻗으라>고 타이르다가도, 상대가 막무가내로 뻗치면 <짚신도 다 짝이 있는 법>이고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고 위로하는 넉넉함을 보이기도 하지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원망하면서도 <누구나 제 먹을 건 가지고 태어난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며 느긋해 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면서도 <말로서 말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고 입을 다물지요. 

  그 외에도 예를 들자면 이런 예는 무척 많습니다. 물론, 이 속담들은 경우와 상황에 따라 절묘하게 달리 쓰입니다. 하지만 인간세상의 양면성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코 세상을 한쪽에서만 보려들지 않아요. 

 

  이런 열린 시각은 언어의 세계뿐 아니라, 그림에도 잘 나타납니다. 우리 겨레의 옛 그림은 서양식의 원근법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그려져 있지요. 사물의 모든 면을 다 보여주는 통시적(通時的) 원근법은 묘한 매력을 줍니다. 물론 그것은 사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마음가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양면성, 다면성은 우리 겨레의 넉넉한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우리 겨레는 참으로 느긋하고 너끈한 민족이었던 것 같아요. 그건 참 기묘한 저력이지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진지 드셨습니까?>라는 목숨 보전, 끼니 걱정의 가슴 아픈 인사를 나누어야하는 살얼음판 세상을 살면서도 느긋함을 잃지 않는 마음, 그토록 많은 수난을 치르면서도 독살스러운 <복수 스토리>는 만들지 않은 고운 덕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불가사의한 생명력이 바로 우리 예술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특히 민속공예품이나 민요 같은 민간예술에서 이런 본질이 싱싱하게 잘 나타나고 있는데, 대충대충 만들다 만 것 같은 물건에서 기묘한 사람냄새가 왈칵 풍겨나오곤 합니다. 깔끔하고 정교하게 완성된 예술품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풋풋한 생명력이지요. 게을러서 적당히 만들다가 끝내버린 것은 분명 아닙니다.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보리밥에 된장국과 풋고추에서 느끼는 그런 맛과는 또 다른 따스한 인간성, 사람냄새를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우리겨레다운 부분이 아닌가 싶네요.

 

  말과 글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올시다. 우리말은 대체로 주어도 생략된 데다가 맺고 끊음이 분명치 않은 경우가 많지요. 예, 아니요를 가리기 애매한 수도 많아요. <글쎄올시다…> <아, 네 뭐…> <그럴 수도 있겠구먼요…> 이런 식으로 애매모호 두리뭉술인 경우가 많지요. 그러면서도 우리말은 <어 다르고, 아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어쨌거나 야멸차게 맺고 짜르는 표현은 되도록 피하고, 그 대신에 넉넉한 감칠맛을 자아내는 것이 우리네 대화법의 한 특징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전라도 사투리의 <거시기>가 아닐까요. 신기하게도 <거시기> 하나로 대충 다 통합니다. 참 신기해요. 

  이런 것을 애매한 적당주의라고 몰아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가 발전하지 못했다고 다그치기도 하지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특유의 느긋함에서 이런 태도가 나온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지 않을까요? 

  숭늉맛처럼 무덤덤하지만 푸근하게 사람다운 느긋함, 뾰죽하게 내 주장만 앞세우기 보다는 상대의 마음을 읽으려 애쓰는 어눌함… 그런 것이 바로 우리의 진짜 힘이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렇던 우리 겨레가 지금은 아마도 세계세서 가장 조급하고 살벌한 민족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매우 급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도 뛰어야 직성이 풀리고, 차 운전하면서 계속 빵빵거리고 욕지거리 퍼부어야 속이 시원한 조급함에 시달리며 허둥지둥 살고 있어요. 

  물론, 그런 덕택에 짧은 기간에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것은 사실입니다. 세계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초고속성장!! 하지만 그것이 와우 아파트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요. 아무리 <누워서 떡 먹기>라지만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급히 먹은 밥이 체하는 법이니까… 

  이제는 우리도 제법 다리 뻗을 만하니, 바늘허리 매어 쓰려고 허둥대는 조급함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네요. 쇠털같이 많은 나날인데…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지…

 

  한글날 하루만이라도 나쁜 말은 쓰지 말고, 고운 우리말, 바른 우리말만 쓰도록 애써보면 어떨까? <*>

세종대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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