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 미술 선구자 백남순 화백의 <낙원>(1936년경)은 아름답고 귀한 작품이다. 

  700호 크기의 대작인 이 작품은 동양화법과 서양화법이 특이하게 결합한 작품으로, 화가가 꿈꾸는 이상향의 다양한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동서양 화풍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 자연, 건축물, 인물 등의 요소들이 어우러지며 몽환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마치 서양화풍으로 그려진 <몽유도원도>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서양의 에덴동산, 유토피아, 파라다이스와 동양의 무릉도원 등이 모두 조화롭게 재현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의 무릉도원 전통과 서양의 아르카디아(낙원) 전통이 묘하게 결합된 독창적인 작품으로, 1930년대 백남순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전해지는 만큼, 역사적 의미가 각별하다”고 밝혔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낙원>이 인류가 원죄를 짓기 이전 천국을 한국적으로 해석하여 우리 전통을 지키려 한 노력이 엿보인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 작품이 그려진 일제 암흑기의 참혹한 현실을 생각하면, 화가의 꿈이 한층 간절하게 울린다. 이 작품은 가장 친한 친구 민영순의 결혼 기념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한다. 암흑기, 결혼, 낙원으로 이어지는 간절한 소망… 

  작품의 형식도 눈길을 끈다. 캔버스에 그린 유화이면서 8폭 병풍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화가는 그림의 테두리까지 그려 넣어 병풍 형식을 강조했다. 

  이 그림을 그린 백남순(1904∼1994)은 나혜석과 함께 1세대 여성 화가의 대표주자로, 일찍이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를 다녔고, 1928년에는 한국 여성화가 최초로 프랑스 파리에 건너가 선구적으로 서양 미술을 공부한 화가다. 

  파리에서 동족 청년 화가 임용련(1901∼1950)을 만났다. 그는 미국 예일대를 수석 졸업하고 유럽 일주여행 중이었다. 

  두 사람은 1930년 센강 하류의 에르블레 성당에서 혼례식을 올리고 귀국하여, 같은 해 동아일보사에서 부부 유화전을 개최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부부는 평안북도 정주로 가서 오산학교로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이때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나중에 국민화가가 된 이중섭(1916∼1956)이다. 

  정주에서 광복을 맞았지만, 공산치하를 피해 월남해야 했다. 미국통이었던 임용련은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가 하면 이들의 작품을 실은 기차가 폭격으로 전소되는 바람에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비운의 화가였다.

  그래서 <낙원>은 백남순 화백의 1930년대 작품 중 유일하게 실물로 남아 있는 매우 귀한 작품이다.

 

  백남순 화백은 남편과 이별 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일곱 자녀를 홀로 키우며 오랫동안 그림을 중단했다가, 1980년대에 들어 다시 화필을 잡았다. 

  당시 80대에 접어든 백 화백은 노령에도 붓을 놓지 않고 정물화, 추상화, 종교화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다수 남겼다. 당시 그의 작품은 화려한 색채에 섬세한 감성을 담은 온화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작품 <낙원>은 <이건희 컬렉션> 중의 하나였는데,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덕에, 미국에서도 실물을 감상할 수 있는 귀한 자리가 주어졌다. 지금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LACMA)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에 가면 원작을 감상할 수 있다. 원작을 감상하기를 적극 권한다.

  

  글: 장소현 (미술평론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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