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10월9일은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것이 1443년이니, 올해로 580년을 맞습니다.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문화의 물결과 함께 한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일이지요.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한글이 빠르게 망가져가며 푸대접을 받는 것도 현실입니다.
한글날을 맞으며 우리말 사랑의 글을 싣습니다.
이 글을 쓴 김영강 작가는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소설가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는 한편으로 남가주 밸리한국학교에서 20여 년 동안 한인 2세의 한국어 교육에 종사하며, 여러 권의 한국어 교재를 집필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구품사입니다. 요즘 저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좋게 말해서 고민이지, 진짜는 아주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답니다. 사람들이 제 자식들을 너무 함부로 막 대하기 때문이에요. 우리에게는 띄어쓰기라는 엄연한 규칙과 질서가 있는데 여러분이 그 규칙과 질서를 무시해서 제 자식들이 아파하고 있답니다.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실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규칙을 잘 지켜 질서가 딱 잡히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게 세상 아닙니까? 보세요. 세상 돌아가는 게 어디 그런가요?
사람도 아닌 제가 이런 말, 하는 거 용서해 주세요. 주제파악을 못 했네요. 죄송합니다.
저는 자식이 아홉 명이나 돼요. 웬 자식이 그렇게 많으냐고요? 옛날 사람이라 그렇게 됐어요. 요즘 젊은이들처럼 하나 둘만 낳았더라면 간편하고 좋았을 것을 말입니다. 그랬다면 여러분도 얼마나 편하고 좋았겠어요? 글쓰기가 누워 떡먹기였을 겁니다.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금세 소설 한 편 썼을 거예요. 허지만 글은 무미건조 했을 걸요? 물론 재미도 없고요. 품사 한둘만 가지고 무슨 좋은 글이 나오겠어요?
아이들 이름을 다 기억하느냐고요? 그럼요. 자식 이름을 모를 리가 있나요? 첫째는 명사이고 둘째는 대명사, 셋째는 수사, 그리고 막내는 조사예요. 그 중간에 다섯 놈이 더 있는데 엄마인 저를 따라 다‘사’자 돌림이랍니다. 이름을 다 얘기하라고요? 그럼 하지요. 넷째가 동사, 그 다음이 형용사, 관형사, 부사, 감탄사입니다. 예전에는 접속사라는 놈도 있었는데 그놈은 그냥 부사에 포함돼 버렸어요.
아니, 아니, 또 있었어요.‘있다, 없다’를 지금은 형용사에 집어넣는데 옛날에는 지정사라고 분류했었지요. 순 우리말로는 잡음씨라고 했어요.
참, 그러네요. 잡음씨처럼 옛날에는 제 자식들 이름이 순 우리말이었어요. 돌림자가“씨”자였어요.“옛날 이름 알아서 뭐해. 골치 아파.”하고 손사래를 치시는 분이 있겠지만 한 번 들어보세요.
이름씨, 대이름씨, 셈씨, 움직씨, 그림씨, 매김씨, 어찌씨, 느낌씨, 토씨……. 참 그리고 지금 문법이라고 하는 단어를 그때는 말본이라고 했어요. 말 되지요? 이제 옛날 이름들은 사용하지 않으니 옛날 얘기는 여기서 그칠게요.
그리고 문교부 높은 양반들이 제멋대로 원칙을 자꾸 바꾸니, 또 언제 어찌될지 모르잖아요? 골치 아파요. 골치 아파. 그러니 지난 과거사는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하루는 막내가 막 울면서 하소연을 했어요.
“엄마, 나는 항상 세 형인 대명사, 명사 수사 뒤에만 붙어서 살아야 하는 엄연한 규칙이 있는데 사람들이 나를 찢어 발겨 뒤에 붙여 놓으니 상처가 아물 날이 없어요, 어떤 땐 뒤에 붙이지도 않고 홀로 두기도 해요. 저는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거 엄마도 잘 알잖아요. 너무 힘들어요. 형들도 나한테 다가올 수가 없으니 나를 바라보면서 눈물만 흘려요.”
나도 울면서 말했어요.
“그래, 그래. 조금만 참아. 사람들이 아직 잘 몰라서 그래. 좀 있으면 형들한테 붙여줄 거야.”
“근데, 엄마. 사람들은 참 이상해. 내가‘이’‘가’‘은’‘는’‘을’‘를’‘로’‘으로’‘에’‘에서’‘에게’‘도’ 등으로 쓰일 때는 붙여 주다 또 띄어 주다 자기네들 맘대로 막 흔들다가‘만’‘뿐’‘대로’‘마다’‘처럼’‘같이’‘밖에’‘보다’‘부터’‘까지’‘조차’‘이다’ 등으로 쓰일 때는 꼭 띄어 놓는다고요. 그럴 땐 그만 피가 철철 흘러요.”
“그래 알아. 그땐 사람들이 네가 조사인 줄을 몰라서 그럴 거야. 네가 두 개 이상 겹칠 때도 마찬가지지? 붙이는 사람이 많아 띄는 사람이 많아?”
“물론 띄는 사람이 훨씬 더 많지요. 그럴 땐 더 아파요. 팔 다리가 다 찢어진다고요.”
얘기를 듣고 있던 명사가 자기도 할 말이 있다면서 불평을 하기 시작하네요.
“엄마, 나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나는 또 갈라졌잖아요? 보통명사, 고유명사, 추상명사, 의존명사··· 그중에서도 의존명사에 문제가 많아요. 분명히 띄어 써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어떤 때는 조사인 줄 알고 붙여 놓는다니까요. 붙어서 끌려 다니려니 힘들어 못살겠어요.”
아이구, 이를 어째요. 명사가 불평을 늘어놓으니 다른 자식들도,“엄마, 나도 나도…….”하고 야단이네요.
“그래. 다 안다. 다 알아. 그래도 너희들은 좀 컸으니 아파도 참을 수 있지만 막내인 조사가 제일 문제다. 문제야. 저렇게 맨날 멍이 들고 피를 흘리고, 또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데 형들이랑 떨어져 있으려니 기댈 데도 없고 말야.”
다들,“그래. 그래. 막내가 너무 불쌍해. 그 어린 것이 불쌍해. 불쌍해.” 하고는 본인들의 고통은 다 참겠다네요. 에구구, 착한 내 새끼들.
구품사라는 이름을 가진 엄마인데도 불구하고 저는 저 위에서 꼼짝 않고 서 있기만 해야 하니, 참 답답하고 한심합니다.
한데, 아버지는 누구냐고요? 글쎄요. 아마도 문교부의 높은 양반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자식들을 제멋대로 쥐고 흔드니까요.
짜장면만 해도 그래요. 어느 날 느닷없이 짜장면은 안 된다, 자장면으로 써라는 추상같은 명령이 내려왔잖아요? 그러면 짬뽕도 잠봉으로 고쳐야 맞을 텐데…… 짬뽕은 그대로입니다. 이건 일본말이라서 그렇다나요?
국민들 불만이 터져 나오자 이번에는 자장면도 맞고 짜장면도 맞는다? 하지만 여러분! 짜장면이라고 해야 입맛이 돌지 않습니까? 자장면… 하니까, 어째 맛이 없을 것 같아요.
소문에 따르면 한글 학자들 사이의 힘겨루기 때문에 맞춤법도 그네를 탄다는 말이 있어요. 옛날엔 무슨 대학 아무개 교수파와 무슨 대학 아무개 교수파 사이의 힘겨루기가 대단했었다고 합니다.
이게 다…… 지만 잘났다고 세상사는 규칙을 안 지키니 질서가 무너져서 생기는 알력 아닙니까? 그러니 내 새끼들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어 상처투성이가 되지요.
거기다가 여러분까지...죄송합니다. 그러나 할 수 없어요. 오늘의 주제는 띄어쓰기이고, 우리 자식들이 그 때문에 아직 아파하고 있으니까요.
그중에서도 막내인 조사가 제일 고통을 당하고 있어요. 앞에 붙여야 하는 조사를 뒤에 붙여 놓으면 그 내용이 완전 달라져 버리잖습니까?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아버지가 무슨 연유로 가방에 들어갑니까? 이게 다 조사의 규칙을 무시하여 질서가 무너져 버린 것이니, 조사는 아픕니다. 눈물을 흘리지요.
어디 조사뿐인가요? 내 다른 자식들도 더러는 울고 있는데 여러분들은“아니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뜻이 완전 달라져 버렸잖아.”하고 깔깔거리며 웃을 때가 있으니 이거 미치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게임 하는데 자꾸 만진다.”고요?
누가 만진대요? 옆의 남자가요? 그게 아니잖아요.“게임 하는데 자꾸만 져요.”가 맞지요.‘만’이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 뜻이 완전 탈바꿈을 했잖습니까? 아주 창피해 죽겠어요.
어디 그뿐인가요?“무지개 같은 사장님”이“무지 개 같은 사장님”으로 둔갑을 하고요. 규칙이 안 지켜지니 질서가 무너져서 문장이 완전 뒤집어져 버립니다.
우리 한글에서 띄어쓰기를 포함한 모든 맞춤법은 결국 말과 말 사이 관계에서 오는 규칙이고, 거기서 나오는 질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실 세계도 같은 이치입니다. 맞춤법 지키듯 세상의 규칙을 잘 지키면 질서는 저절로 잡힐 터이고요. 이게 바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지름길일 수 있지요.
또 주제 넘는 소리를 했네요. 사람도 아닌 것이.
그런데요, 일본말이나 한문은 띄어쓰기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 옛말에도 띄어쓰기가 없었고요. 근데, 저는요, 띄어쓰기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 붙여 놓으면 그 뜻도 이건지 저건지 금세 분간이 안 돼 혼동이 오고, 보기에도 정신없고, 눈도 어지럽지 않겠어요?
띄어쓰기가 잘된 글은 신뢰감을 줍니다. 상품 선전을 하는 광고의 글이 엉망일 때는 그 상품의 질이 툭 떨어지고 맙니다. 안 사요. 안 사.
그러니까 말과 글은 사람의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규칙을 무시하고 제 자식들을 함부로 막 대하면 우리는 다 뿔뿔이 흩어져 가정파탄이 나고 맙니다. 흩어져 떠돌다가 멍들고 병들어 제 구실을 못 해요. 그러면 여러분의 글도 힘을 못 쓰고 비실거리다가 결국은 쓰러지고 맙니다. 큰 낭패지요. 큰 낭패.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규칙과 질서를 지키면서 제 자식들을 좀 소중하게 다루어 주세요. 그렇게만 해주시면, 우리 자식 아홉이 여러분을 한껏 도와, 쓰시는 글마다 최고의 좋은 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좋은 글이 쏟아지면 세상도 더 아름답고 환해질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