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보통의 사람들은 그저 ‘이웃을 사랑해야 하나 보다’라고만 받아들이게 되는데 사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큰 도전을 줍니다.
여기서 “같이”라는 말은 “~하는 만큼”이라고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즉 네 몸을 사랑하는 만큼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만, 우리는 우리의 몸을 참으로 애지중지합니다. 한국에 있는 할머니가 쓴 글을 보았습니다. 할아버지하고 두 분만 그렇게 사는데, 방학 때가 되면 가끔 아들만 셋 둔 딸이 미국 남편하고 한국에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2-3주 집이 난리가 된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뛰어다니고, 미국 사위는 안마의자에서 떠나지를 않고 세탁기에 식기 세척기를 돌리면, 어떤 때는 전기 과부하로 정전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있다가 손주들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 할머니는 며칠을 앓는데, 그렇게 앓으면서 하는 말이 있답니다 “손주는 올 때 반갑고 갈 때는 더 반갑다” 피붙이도 반갑고 좋지만, 우리는 몸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상처가 나면 뭐 발라주고, 통증이 있으면 뭐 먹어주고, 어디가 부러지면 깁스 해주고, 부으면 찜질해 주고, 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쉬지 않고 해주고, 모든 노력을 다해서 몸이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도 모잘라 특별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면서 유난을 떨기도 합니다. 또 몸과 우리와의 관계는 조건적으로 대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조건 주고, 무조건 관리하고, 무조건 보살펴야 합니다.
작가 박완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젊었을 적의 내 몸은 나하고 가장 친하고, 만만한 사람이 자기 아픈 것에 신경 써주지 않으면 우리는 원망합니다. 서운해할 정도로 몸이 귀중합니다. 몸 벗이더니 나이 들면서 차차 내 몸은 나에게 삐치기 시작했고, 늘그막의 내 몸은 내가 한평생 모시고 길들여 온, 나의 가장 무서운 상전이 되었다.” 우리는 그 몸이 아플까 봐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우리의 몸이 있는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할때에,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이어야 합니까? 우리가 형제와 이웃을 사랑할 때는 그저 하는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하는 만큼 하는 게 아니라, 몸이라는 상전에게 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미국의 브라이언 존슨이라는 45세의 미국 남성은 18세의 자기 몸으로 돌아가는 회춘을 목적으로 매년 200만 불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건강 유지를 위해 30명의 의료진의 감독 아래 채식주의 식단과 운동 그리고 규칙적인 수면을 실천하고 매일 몸을 체크하고 24개의 건강 보충제를 먹는다고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이웃을 위해 일 년에 얼마만큼의 돈을 써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여러분들은 이웃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