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 궁금대감이라는 별명을 가진 할아버지가 계셨다. 요새도 가끔 그 할배 생각이 난다.
어찌나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 많은지, 만나는 사람마다 불러 세워놓고 이것저것 꼬치꼬치 궁금증을 풀어놓는 바람에 사람들은 그 할배를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
어른이건 아이들이건 할 것 없이 붙들고 질문을 퍼부어대는데, 그 질문이라는 것의 대부분이 사람들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가령, 꽁지뼈는 꼬리가 있었던 흔적이냐, 꼬리가 나오려는 징조냐?
어째서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보다 많은 거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데 정말 오기는 오는 거냐?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거냐, 동물원에서 탈출해 오는 거냐?
왜 캄캄하면 아무 것도 안 보이냐?
어째서 키는 위로 크는 것이냐, 아래로 크면 안 되냐?
어째서 착할수록 살기 힘드냐?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의심해보는 것이 깨달음의 시작이라고 누군가 말했다지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골라서 해대는 궁금대감을 좋아하기는 어려운 일…
모두들 슬금슬금 그이를 피하고, 드디어 외톨이가 된 그이는 스스로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것을 물어댔지만, 대답은 없었다.
외로움은 무게냐? 부피냐?
산울림은 산 위에서 오나, 밑바닥에서 오나?
죽음은 끝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사람은 왜 사나? 무엇으로 사나?
예술은 왜 필요한가, 도대체 왜 필요한가?
드디어 궁금대감이 매우 궁금하게 세상을 떠나고, 사람들은 묘비에 이렇게 적었다.
“궁금증 끝내 못 이겨
여기 누워서도 자못 궁금해하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묘비명을 멋지게 지으려 애를 쓰는 걸까?
(장소현 짧은 이야기 모음 <철조망 바이러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