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고 있네요.
세상 사람들이, 특히 정치판의 인간들이 부끄러움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세상이 이렇게 살벌하고 혼란스럽지 않을 텐데… 사람이기를 포기한 듯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참 안타깝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습니다. 부끄러움에 대해서 쓴 절절한 시들, 하늘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 마음이 한결 푸근해지네요.
부끄러움 잃은 세상을 부끄러워하며 윤동주의 시를 읽습니다.
서 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는 윤동주의 <서시(序詩)>다. 조사 대상이나 방법에 따라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1위를 차지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윤동주의 <서시>가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것 같다.
이 시가 우리 가슴을 울리는 까닭은 부끄러움 없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줄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부끄러움’은 윤동주 시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정서이기도 하다. 곳곳에서 부끄러움을 노래한다. 가령 <쉽게 씌어진 시>의 한 구절은 어떤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부끄럽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되살피는 심경을 <참회록>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보며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부끄러움’이라는 낱말 자체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오늘날, 윤동주 시의 울림은 한층 절실하고 우렁차다. 교회나 절집의 종소리보다 한결 큰 울림으로 황량한 벌판을 퍼져나간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산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흠결 없는 인간이 어디 있고, 얼룩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이나 생각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넓은 시각을 찾기 어렵다. 상대편의 결함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우선 물어뜯고 본다.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죽은 사람이건 산 사람이건 무조건 물고 본다. 우리 편이 아니면 무조건 적이다. 잘못 물었음이 분명하게 밝혀져도“아니면 말고!”한 마디면 간단하게 끝이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친일파, 빨갱이, 미투, 갑질 등등…
좀 심한 표현 같지만, 지금 한국의 정치판, 법조계, 언론계, 온라인 세상 등에는 들짐승 같은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것으로 보인다. 부끄러움을 알고, 사람 같은 사람들은 그런 세상이 싫어서, 참을 수 없어서 꽁꽁 숨어버렸다. 드디어 보수언론이 사설 제목으로‘도저히 정상이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발호하는 나라’라고 한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존경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존경할 사람이 없는 사회는 기둥 없는 집이나 마찬가지다. 정말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는 걸까?
그나마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서둘러 떠나가고, 사나운 들짐승들만 으르렁거리는 벌판에서 희망을 찾을 수는 없는 걸까?
부끄러움에 대해서 생각하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그립다. 온 국민이 윤동주의 <서시>를 외우면 세상이 좀 건강해지려나?
윤동주 시인의 생애
시인 윤동주(尹東柱)의 생애는 영화나 책을 통해서 널리 알려져 있다. 세 나라에 걸친 그의 짧은 생애를 요약해본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일본의 형무소에서 생을 마쳤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전학하였다. 1943년 귀향 직전에,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고종사촌인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은 뒤, 광복을 몇 달 앞두고 28세의 젊은 나이로 후쿠오카형무소(福岡刑務所)에서 생을 마감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시를 썼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친구 정병욱(鄭炳昱)과 아우 윤일주(尹一柱)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윤동주의 유일한 시집이다.
윤동주의 시 세계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윤동주의 시는 한마디로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였다. 동시에 특정한 사회, 문화적 상황 속에서 체험한 것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관련지음으로써 보편적인 공감대에 도달하였다.”
일본인들의 윤동주 사랑
윤동주 시인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다. 그가 다닌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져 있고, 인왕산 자락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고, 부암동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있다.
일본에서도 윤동주 시인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를 기리는 사업이나 행사도 열린다.
좋은 예로, 윤동주가 다녔던 교토의 도시샤대학은 오는 2월 16일 그의 80주기에 맞춰 사후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한다.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1875년 설립된 이 대학이 사자(死者)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건 처음이라고 한다. 고하라 가쓰히로 총장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유를 탄압하는 (일본) 군부에서 윤동주를 지켜내지 못한 분함이 있다. 명예박사학위는 그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도시샤대학 교정에는 윤동주 시비(詩碑)가 있다. 시비에는‘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그의 <서시(序詩)>가 새겨져 있다. 시비 앞에선 매년 그의 기일마다 빠짐없이 헌화식이 열린다.
교토부(府) 우지시의 우지강 근처 한 귀퉁이엔 <기억과 화해의 비>가 서있다. 1943년 6월 이곳에서 귀국을 결심한 스물여섯의 윤동주는 영문과 친구들과 송별 소풍을 했다. 생전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윤동주가 살던 하숙집 터에도 시비가 세워졌다. 이후 교토예술대학 캠퍼스로 바뀌었는데 대학 측이 그 터에 시비를 세운 것이다. 후쿠오카 시민들은 윤동주가 1945년 2월 스물여덟의 나이로 순국한 후쿠오카형무소 자리에 시비를 건립하려는 운동을 지금도 벌이고 있다.
물론, 모든 일본인이 윤동주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윤동주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은 우리 생각보다 많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일본에서 여러 차례 번역본이 출판되어 읽히고 있다. 일본인들도 윤동주의 시를 만나면 맑은 언어와 도덕적 순결함에 빠지는 것이다.
조선일보 도쿄 특파원 성호철 기자의 말에 공감한다. 깊이 새겨야할 말이다.
“정치는 겨우 5년짜리 언어지만, 윤동주는 한국인과 일본인을 100년 이상 이어줄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