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계를 통틀어, 딸과 결혼하기 위해 미래의 장인을 고소하고, 장인은 미래의 사위를 고소하여 법정에 선 작곡가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트로이메라이’를 작곡한 슈만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서 슈만 (1810 -1856)은 초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서, 평론 및 저술 활동을 통해 슈베르트, 쇼팽, 브람스, 베를리오즈 등 많은 음악가를 알리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슈만은 출판업을 하는 아버지의 막내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문학을 접할 수 있었고, 또한 문학적인 재능이 있어서, 아버지가 출판한 책에 그의 원고가 실린 적도 있었으며, 음악적인 재능도 있었습니다. 슈만은, 그러나, 어머니의 바람으로 인해 1828년, 법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망으로, 결국은 프리드리히 비크의 문하로 들어가서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빨리 배우고 싶은 욕망이 지나쳐, 오른손 손가락을 영구적으로 다쳐, 결국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하고, 음악 평론과 작곡가로서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슈만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스승 프리드리히 비크 Friedrich Wieck에게는 당시 피아노를 잘 치는 딸 클라라 Clara가 있었는데, 14살이 겨우 된 그녀와 불같은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려 했지만, 빈털터리 작곡가이며 여성 편력이 있는 슈만과의 결혼을 스승 비크는 결사반대했습니다. 결국 비크는 슈만을 '미성년자 유괴'로 고소했고, 슈만도 스승을, 결혼을 못 하게 한다고 맞고소하는, 민망한 법정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법정 다툼은 1940년, 클라라가 성년이 되면 아버지의 허락 없이 결혼할 수 있다고 판결했고, 두 사람은 그해 9월에 결혼했습니다.
“어린이의 정경”은 1838년 작곡된 13개의 피아노곡인데, 이 중 특히 7번째 곡, ‘꿈’ (트로이메라이)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곡은 어린 날의 동심으로 돌아가는 어른들을 위한 곡입니다. 슈만은 이 곡을 9살 나이 차가 났던 클라라의 편지에서, “나는 당신에게 어린애처럼 보일 때가 많은 것 같아요”라는 문장에서 영감을 받고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어로‘트로이메라이’는 꿈으로 해석되지만, 슈만의‘꿈’은, 간절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을 때 꾸는‘꿈’ 혹은 어떤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좌절 속에서 꾸는‘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곡을 작곡할 때, 스승 비크가 딸 클라라와의 결혼을 결사반대하는 좌절의 쓰라림 속에서, 사랑하는 클라라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환상을 꿈으로 승화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슈만의‘트로이메라이’ 피아노 연주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멘트가 있는데, 엘가 Elgar의 첼로 협주곡에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 처럼, 우크라이나 출생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Vladimir Horowitz의 연주가 있습니다.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80을 넘긴 나이에, 연주가로서 은퇴를 앞두고 고국 러시아에서 고별 공연에서 연주한‘트로이메라이’를 최고의 연주로 꼽습니다. (Youtube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연주 시간이 채 3분 안 되는 짧은 곡이지만, 몇 번을 들어도, 매번 아름다운 환상의 꿈을 꾸게 해 줍니다.
고별 연주회에서, 많은 이들이 눈을 감고 진지한 표정으로 연주를 경청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보여줍니다. 60년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연주하는 마지막 연주회이기에, 더 간절하고, 더 소중하게 다가온 연주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슈만은 바이올리니스트 요하힘 Joseph Joachim의 소개로 만난 브람스를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클라라는 브람스를 아껴주었던 스승 슈만의 아내이었습니다.
슈만의 우울증이 심해져서, 라인강에 투신자살도 시도했으며, 결국 정신병원에서 1856년 7월에 4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클라라는 77년 생애 중 16년은 슈만과의 결혼 생활이었고, 나머지 43년 동안 브람스와 만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1896년 5월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뒤 브람스의 건강도 눈에 띄게 쇠약해졌고, 결국 이듬해 4월 브람스도 클라라를 따라가듯 세상을 떠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