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1922-2009)과 법정 스님(1932-2010)은 종교의 벽을 허물고 화합하는 모습으로 감동을 안겨준,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큰 어른이었습니다. 나이와 종교를 떠나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던 두 분은 서로의 성스러움을 인정해 종교 간의 화해를 실천했습니다.
두 분과 함께 개신교의 강원용 목사도 종교간 이해와 화해의 시대를 연 선구자였습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 그분들이 남기신 향기로운 자취를 다시 더듬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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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추기경이 2009년 2월16일 선종하자 법정 스님은 신문에 특별기고한 추모사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를 통해 무거운 슬픔과 진솔한 애도를 표현했다.
“지금 김수환 추기경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우리들 마음속에서는 오래도록 살아 계실 것이다. 위대한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하느님을 말하는 이가 있고 하느님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다.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그 존재로서 지금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영혼으로 감지하게 하는 이가 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이를 잃은 슬픔에 젖어있다”
“그분이 그토록 사랑한 이 나라, 이 아름다운 터전에 아직도 개인 간 종파 간, 정당 간에 미움과 싸움이 끊이지 않고 폭력과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진다. 이러한 성인이 이 땅에 계시다가 떠났는데도 아직 하느님의 나라가 먼 것인가”
“인간의 추구는 영적인 온전함에 있다. 우리가 늘 기도하고 참회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깨어지고 부서진 영혼을 다시 온전한 하나로 회복시키는 것, 그것이 종교의 역할이다.”
길상사 개원식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했던 일을 회고하기도 했다.
“첫 만남의 자리에서도 농담과 유머로써 종교 간의 벽, 개인 간의 거리를 금방 허물어뜨렸다. 그 인간애와 감사함이 늘 내 마음속에 일렁이고 있다. 그리고 또 어느 해인가는 부처님오신날이 되었는데, 소식도 없이 갑자기 절 마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셨다. 나와 나란히 앉아 연등 아래서 함께 음악회를 즐기기도 했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이듬해인 2010년 3월11일 법정(法頂) 스님이 입적했다. 한해 터울로 종교계 거목이 별세하자 많은 이들이 허전함과 안타까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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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은 1997년 12월14일 법정 스님이 창건한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법정 스님은 이듬해 2월24일 명동성당에서 특별강론을 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님의 넓은 도량에 보답하기 위해 찾아왔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인연’과‘천주님의 뜻’에 감사한다”고 말문을 열어 신도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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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김 추기경뿐 아니라 이해인 수녀를 비롯한 많은 가톨릭 수도자들과 친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웃 종교인을 불자에 비해 전혀 차별하지 않을 만큼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법정 스님은 천주교 수녀원과 수도원에서도 자주 강연했고, 부처님 오신 날의 연등 수익금 10%를 서울가톨릭복지회에서 운영하는 <성가정 입양원>의 후원기금으로 기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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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은 상(相)에 얽매이지 않은 불교 수행자답게 관세음보살과 성모 마리아의 차별을 넘어섰다.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 제작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당시 가톨릭미술가협회 회장이던 조각가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에게 맡겼다. 이 관음상은 이마 위에 보관을 쓰고 왼손에 감로보병을 든 전형적인 관음상이면서도 깊은 슬픔에 잠긴 성모마리아의 분위기를 물씬 풍겨 ‘마리아 관음상’이란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그 이전인 1970년대 초 서울 강남 봉은사 다래헌과 조계산 불일암에 머물 때 서가 한편에 성모상을 모셔두고 촛불 공양을 올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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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는 1962년에 열린 제2차 바타칸공의회 이후 다른 종교에도 옳고 성스러운 것이 있다고 인정했다. 한국 천주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김수환 추기경은 독일 유학 시절 이웃종교에 닫힌 창문을 활짝 열었던 교황청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지켜보고, 귀국해 가톨릭의 변화를 이끌었다.
김 추기경은 2000년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을 연구하는 심산사상연구회로부터 심산상을 받은 이후 심산의 묘소에 참배하면서 유교식으로 큰절을 올려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김 추기경은 심산상 수상 강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유교의 인(仁)사상, 불교의 대자대비사상, 그리스도교의 사랑 정신이 함께 손을 잡고 대자연의 생명을 해치고 동족 분단의 아픔을 겪는 이 땅에서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변화시켜 갈 때 한국 민족은 환태평양시대에 명실상부한‘동방의 빛’으로 인류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게 될 것이다.”
또 김 추기경은“유교나 천주교나 모두‘효의 종교’이지만, 그리스도교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큰 효도를 바탕으로 부모께 대한 효를 하려는 하향적이고, 신본(神本)적이고 미래적인 성향인 데 비해, 유교는 부모에 대한 효를 통해 천(天)에 대한 큰 효도로 올라가는 상향적이고 인본(人本)적이고 현재적 성향이 강해 상호 보완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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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강원용 목사도 다종교인 한국 사회에서‘종교간 이해와 화해’의 시대를 연 선구자였다.
강 목사는 자기 종교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배우는 겸손의 자세를 강조하고, 생명과 평화를 위해 함께함을 중시했다.
젊은 시절 강 목사와 함께 종교간 대화의 물꼬를 튼 이후 법정 스님은 크리스찬아카데미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4년 불일암 은둔에 들어갔지만 그리스도인들과의 친분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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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자인 문현철 초당대 교수의 고백은 법정 스님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말해준다.
문 교수는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잇기 어렵던 대학 시절 법정 스님으로부터 남모른 도움을 받았는데, 가톨릭 영세를 받던 날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는 법정 스님에게“하느님이 어떻게 영세받은 날 교통사고를 나게 할 수 있느냐?”고 불평하며 개종의 뜻을 밝혔다. 그때 법정 스님은 이런 말씀으로 가톨릭 신앙을 지키도록 해주었다는 일화.
“천주님은 그런 만화 같은 일을 하는 분이 아니고, 이런 아픔을 통해 더욱 성숙해지도록 힘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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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추기경과 법정 스님은 무소유, 빈자를 위한 가난에 깊은 교감을 나눴다. 구도와 무소유, 가난한 삶의 도반(道伴)으로 여기면서 소중한 사귐을 가지신 것으로 보인다.
김 추기경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위한‘우선적 사랑’에 못다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추기경은 성(聖)프란치스코의 생애에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았다. 기독교 최대의 성자 프란치스코는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일체의 소유를 버리고 낮은 자가되어 오직 그리스도를 모방하려고 애쓰고, 가장 그리
스도의 성심을 품고 산 사람이었다.
“내 삶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부분이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호소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의무감에도 나온‘땜질식 사랑’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법정 스님은 수도자들이 가난하지 않고서는 보리심, 진리에 대한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맑은 가난은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맑은 가난, 즉 청빈(淸貧)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맑은 가난이란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고,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현실에 만족하는 것이다. 적은 것으로 넉넉해 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해야한다”
“어려울수록 물질뿐 아니라 말 한마디, 표정 하나라도 나눠야 한다.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이냐? <*>

김추기경과 법정스님

▲ 한국 종교계의 어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