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계령
하덕규, 정덕수 공동작시,
하덕규 작곡, 양희은 노래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가수 양희은이‘탁월한 공명을 가진 청아한 목소리’로 부른 <한계령>은 강한 시적 울림으로 듣는 이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노래다. 노래를 듣는 이들의 추억이나 경험을 되살려주고, 몸과 마음을 쉬고 씻으며 위로받았던 한계령의 신비로운 풍경을 떠올려준다.
한계령은 삶을 돌아보는 천상의 곳이다. 그래서 한계령에서는 무조건 양희은의 청아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1985년 발표된 이 노래는 작곡가 하덕규와 가수 양희은, 방황하는 청춘의 아픔을 담고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길 잃은 양처럼 고향을 찾은 두 청춘에게 빚을 진 노래다. 그 절실함이 큰 만큼 울림도 더 묵직한 것이다.
한계령(寒溪嶺)은 인제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백두대간 고갯길이다. 한자 의미는‘차가운 시내’다.
하덕규에게 한계령은 어린 시절 추억이 묻어나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한계령 아래 고성군 토성면 천진마을에서 자란 그에게 안개를 두르고 묵묵히 서 있는 산은 친구 같은 존재였다.
추계예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그림을 포기하고, 1981년 기타리스트 함춘호와 함께 <시인과 촌장>으로 데뷔한 하덕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의 날들을 보냈다.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했지만 노래도 그에게 큰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의 노래 <가시나무>의 가사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나 많았다.
지금 목회자가 된 그는 한 간증에서 말했다.
“20대 중반 한계령에서 떨어져 죽을 마음으로 어릴 때 늘 바라보던 마음의 고향 한계령을 찾았다. 거기서 죽음 대신 삶의 영감과 노래를 얻었다. 산은 우지 마라고 하고, 내려가라 했다. 다시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라고 밀어내는 느낌을 받았다.”
그 감흥을 노래로 만들어 선배 양희은에게 주었다. 하덕규의 탁월한 시적 감성과 재능이 청춘의 아픔과 방황을 구원의 노래를 탄생시킨 것이다.
한편, 양희은은 이 노래를 발표한 1985년, 나이 서른셋이었다. 더 이상 청춘의 우상인 통기타 청바지 나이가 아니었다. 가수 양희은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 했다. 그때 만난 노래가 <한계령>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앨범이 나온 지 5~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입을 타고 대중에게 불리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한때 잠시 미국에 살던 양희은이 귀국해서 새로운 음악세계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노래는 시적 비유가 넘치는 몇 안 되는 가요 중 하나로 평가된다. 예를 들어 2004년 문학계간지 <시인세계>가 설문조사한‘시인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표를 받았다.
이 노랫말에는 사연이 있다.
<한계령>은 하덕규 작사, 작곡으로 발표됐지만, 20여년이 지나서 무명시인 정덕수의 <한계령에서1>이라는 시의 구절을 원작자 허가 없이 발췌해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하덕규는 이 시에 감명을 받아 부분부분 발췌해 가사로 만들었음을 인정했고, 그동안의 저작권료에 대한 보상을 하겠다고 했지만, 정덕수는 DSLR 카메라 한 대면 충분하다고 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하덕규와 정덕수가 공동작사가로 돼있다.
정덕수는 한계령 아래 산골짜기 오색에서 태어났다. 가난해서 어머니는 일찍 집을 나가고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그는 무작정 상경해 봉제공장에서 삶을 이어갔다. 그러다 1981년 나이 열여덟에 그런 삶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어릴 때부터 설악에서 나무지게를 지고 다니며 한계령의 구름과 바람을 벗 삼아 공책에‘한 줄기 바람처럼 살고 싶다’고 글을 끄적이던 소년은 그렇게 한계령 시인이 된다.
정덕수는‘한계령 시인’으로 불리며, 설악의 시를 쓰고 사진을 찍으며 설악에서 살고 있다.
(이 글은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오광수 대중음악평론가 등의 글을 참고로 했음을 밝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