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2000년 봄, 이후 몇 개월은 누구나 그렇듯이 신분 문제, 아이들 학교 문제, 생활 적응 문제 등으로 정신없고 참 힘이 들었다. 마음 한편으론 늦은 이민이라는 선택에 조금씩 자신감이 떨어져 갈 때쯤, 틈틈이 도움을 주던 한 이웃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해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나섰던 헐리우드볼 음악 공연은, 한마디로 신세계에 온 듯이 환상적이었다.
잠시나마 시름과 걱정을 내려놓고, 낭만적인 분위기의 시원한 여름밤, 총총한 별빛 아래서 와인을 홀짝이며 LA 필하모닉이 연주하던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에 온전히 빠져들며 느꼈던 정말 모처럼의 평화로움과 잔잔한 감동. 그러면서 ‘여기도 살아볼 만한 곳이구나’ 하며 조금씩 피어오르던 작은 안도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이후 25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5월이 되면 몇 개씩의 프로그램을 예약해 아이들과, 또는 친구들과,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남편과 단둘이서라도 꼭 찾아가는 우리의 즐거운 연례행사가 헐리우드볼 여름 공연이다.
1922년, 헐리우드 힐스 지역의 야트막한 산자락 아늑한 녹지대에, 조개껍데기를 세워 놓은 듯 독특한 아치 모양의 세계 최대 야외 공연장이 들어섰다. 그리고 1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공연장에서 LA 필하모닉의 열광적인 첫 공연이 열린 이후, 클래식, 재즈, 영화 음악, 팝과 록 뮤직, 뮤지컬 등 세계적인 거장들과 뮤지션들의 공연이 이어지며, 10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LA 문화계의 상징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세계적인 음악인 가운데 헐리우드볼 무대에 서지 않은 아티스트는 없을 정도다.
매년 7월 초, 독립기념일 축하 공연을 시작으로 9월 말까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공연이 이어진다. 한여름의 무더위에도 이곳만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밤이 되면 여분의 겉옷이 필요할 만큼 서늘해진다.
공연 시작 두세 시간 전이면, 이미 공연장 주변 잔디밭과 수많은 피크닉 테이블에는 한껏 멋을 낸 차림의 엔젤리노들(Angelenos)이 모여, 맥주와 와인,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가족, 친구들과 웃음꽃을 피운다. 이 평화로운 풍경은 LA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이 될 것이다.
헐리우드볼 공연을 빼놓고는 LA를 제대로 즐겼다고 할 수 없다고도 한다.
어느 해, 옆자리에 앉은 노부부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뉴욕에 살고 있다는 그분들은, 해마다 헐리우드볼 공연을 보기 위해 LA에 와서 한 달간 호텔에 머물며, 독립기념일 불꽃놀이 공연부터 거의 매일 공연을 관람해 왔다고 했다. 그렇게 20년째 같은 여름을 이어오고 있다는 말과 함께, “이렇게 멋진 야외 공연장을, 그것도 여름 내내 즐길 수 있는 곳은 뉴욕은 물론, 전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정말 행복해요.”라고 웃으며 말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유럽이나 미국 동부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도시에 비해, 서부의 문화적인 부분은 다소 부족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헐리우드볼이 주는 묵직한 존재감이 그 아쉬움을 대신한다고 말한다면, 조금은 과장일까. 아무튼, 그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러던 중, 2004년부터 시작된 ‘한국의 날’ 공연은 LA 지역 한인들에게 가뭄의 단비 같은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세대별로 고르게 안배된 수많은 한국의 유명 가수, 아이돌 그룹, 성악가 등이 초청되어 공연을 펼치는 날이면, 마치 즐거운 소풍처럼 한인타운이 들썩였고, 타주에서도 장거리 여행을 마다하지 않고 찾는 관객들로 붐볐다.
사실 헐리우드볼 공연장이 특정 타인종 커뮤니티에게 전체 공연장을 단독 개방한 적은 없었고, 과연 18,000석을 채울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넓은 공연장을 한인들만으로 가득 메운 폭발적인 반응에 헐리우드볼 관계자들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일회성 행사에 그칠 줄 알았던 그 열기는 매년 4월 말 정기공연으로 이어졌고, 초기에는 한인들 중심이었던 관객 구성도 해가 갈수록 타인종 젊은이들의 비율이 놀랍도록 증가하면서, 이 공연은 K-팝 문화를 미국 전역에 확산시키는 전초기지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게 되었다.
15회까지 이어졌던 이 열정적인 공연이, 팬데믹 사태로 인해 2019년 공연을 마지막으로 중단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LA 필하모닉을 이끌고 있는 ‘구스타보 두다멜’은 베네수엘라라는 다소 불리한 변방 출신의 약점을 천재적인 기량으로 극복하고, 떠오르는 신예로 주목받았다. 그리고 2009년, 28세의 나이에 LA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로 부임하면서 주류 음악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16년간 그는 LA 필하모닉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오케스트라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시켰고, 자신 역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 그가 결국 2025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LA를 떠나, 뉴욕 필하모닉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LA 필하모닉의 메인 공연 무대인 디즈니 콘서트홀과, 여름 콘서트 무대인 헐리우드볼에서 우리는 그의 마지막 지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의 공연 프로그램 몇 개를 찾아봤지만, 아쉽게도 비교적 저렴한 티켓은 이미 매진되었다는 소식에 마음 한켠이 못내 서운하다.
우리에게 헐리우드볼의 기쁨을 처음 알게 해준 그 친구 부부는, 나이가 들면서 "여기서는 외롭다"는 말을 남기고 얼마 전 한국으로 역이민을 떠나버렸다. 그들이 남기고 간 자리는 아직도 작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2025년 헐리우드볼 여름 공연. 그래도 우리 가족은 여전히 씩씩하고, 기쁘게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며 또 한 해의 여름밤을 맞이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