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너는 누구냐?
웬 뜬금없는 실존철학적 잠꼬대냐구요? 글쎄요, 지금 내게는 매우 심각한 질문입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몇일 전 친하게 지내던 사람 장례식에 갔었는데… 그 사람 참 안타깝게 갔어요. 성공적으로 잘 살던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이라는 게 참… 무지하게 슬프데요. 슬퍼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번개처럼 그런 생각이 든 거예요, 너는 누구냐?
묘지에 이름이나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다… 뭐 그런 거 적은 동판 있잖아요. 문패 같은 거… 그걸 보는 순간에 “아, 나는 어떤 이름으로 죽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탁 들지 뭡니까… 탁 달라붙어서 떠나질 않아요. 깜짝 놀랐죠.
왜냐구요? 내가 이름이 여러 개 거든요.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재키 래핑스톤, 재클린 콩탁, 공복자… 이게 모두 내 이름입니다. 이것 말고도 몇 개 더 있어요.
미국에서 여자로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나만 그런 거 아닐껄요…
재키 래핑스톤은 영업용 이름입니다. 밥벌이 때 쓰는 이름… 미국 사람들과 일하다 보니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놈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야 비즈니스 제대로 하기 어렵지요. 그래서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은 영어이름을 만들었죠. 이왕이면 재미있게 하자. 그래서 래핑스톤을 붙였어요.
래핑스톤 그러니까‘웃는 돌’은 내 예명입니다. 옛날에 노래 부를 때 쓰던 이름인데요. 무명 가수였거든요. 돌맹이처럼 생겨 가지고 실실 웃기는 잘 웃는다고 웃는 돌, 래핑스톤이다. 한자로는 소석(笑石)… 아 그래도 웃는 돌이 굴러다니는 돌, 롤링 스톤보다 낫지 않나요? 안 그래요?
아무튼 미국 생활하면서 이 이름 덕을 많이 봤습니다. 사람들이 재미있어 했거든요. 고마운 이름이죠.
재클린 콩탁은 법적 이름입니다. 운전면허중이나 여권에 적힌 리걸 네임. 내 성이 공씨이고, 이혼한 남편 성이 탁씨, 그래서 콩탁이 됐죠. 그냥 미세스 재클린 탁이라고 해도 되는데, 어쩐지 섭섭해서 콩탁으로 했어요. 지겹게도 콩탁거리며 싸웠죠. 그리고는 바이바이…
공복자(孔福子)는 한국에서 쓰던 본명,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복 많이 받으며 살라고 복자라고 지었다네요. 나도 어렸을 적에는 제법 복스럽게 생겼었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름만 복자였지 복 받은 기억은 거의 없네요. 오히려 ‘공복’으로 배고팠던 기억만 생생하네요. 어째서 그렇게 지질이도 가난했던지… 학교에 가면 아이들은 나만 보면 콩 볶자, 콩 볶자며 놀려댔죠.
콩 볶자 콩 볶자, 무슨 콩 볶을까?
동글동긍 검정콩, 길쭉길쭉 완두콩
무서워라 베트콩, 콩 볶자 콩 볶자,
아이구 맛있어라, 콩 볶자 콩 볶자,
아 그런데, 미국에 오니, 이번에는 미국 친구들이 콩뽁짜 콩뽁짜 이렇게 부르지 뭡니까! 기겁을 했죠. 콩이 아니라 공이라고 아무리 말해줘도 안 통해요. 계속해서 콩뽁짜 콩뽁짜… 하긴 뭐 공이나 콩이나 굴러다니기는 마찬가지, 굴러다니다가 구석에 처박히기는 마찬가지…
어쨌거나 내 본명이 공복자라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재키 래핑스톤과 공복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거죠. 한 사람을 두 사람으로 아는 겁니다. 한 사람과 두 사람 사이… 참 실존적 희비극이네요.
그건 그렇고, 형편이 이러니, 내 무덤에 어떤 이름으로 문패를 달아야 하나… 부모님이 주신 본명을 쓰는 게 맞다고 말하겠지만, 난 그 이름이 아주 싫거든요. 지긋지긋해요. 그렇다고 콩탁씨로 죽기도 싫고, 여러 가지 이름을 모두 적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사이)
그건 그렇고, 거창하게 말해서 이름이 세 개이니 자기 정체성도 세 개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죠. 그렇지는 못하죠. 지킬박사와 하이드도 아니니…
나는 과연 누구냐? 어떤 것이 가장 나다우냐?
이건 참 실존철학적 문제입니다. 그렇죠?
생각해보면 미국에 오지 않았으면 애당초 생기지도 않았을 일입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생긴 갈등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유식하게 말하면, 디아스포라 여성의 숙명적 희비극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정체성의 갈등이 이름도 버리고 정체성도 내동댕이쳐버리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렇지 않나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