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1995년 11월3일, 끝내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 30주기를 맞으며, 그분의 삶과 음악세계를 되짚어보기 위해 위진록 선생의 글을 싣는다.
윤이상(尹伊桑) 선생은 1917년 통영에서 태어나, 서독과 통일 독일에서 활동한 현대 음악 작곡가로, 한국음악의 뛰어난 예술성을 세계에 알린 한류의 선구자인 셈이다. 지금 여러 분야의 K-컬쳐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지만, 유독 작곡가는 아주 귀해서 진은숙 씨를 꼽을 정도인데, 윤이상 선생은 일찍부터 큰 성취를 이룬 선구자였다.
그러나, 한국 군사정권의 박해로 감옥살이를 했고,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간 뒤에도 한국에서는 전혀 활동할 수 없었고, 그렇게 그리던 고향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물론, 지금은 세상이 달라져서, 선생의 고향인 통영에 윤이상 국제음악당이 세워지고, 윤이상 음악세계를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윤이상 동요제 등의 행사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선생의 유해도 옮겨와 윤이상 기념공원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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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선생
“동양에서는 잉태한 여성이 용꿈을 꾸면 태어난 자식이 특별한 운명을 지니게 된다고 믿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가 태어나기 전 용꿈을 꾸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길몽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 말씀해주신 꿈을 전하자면, 어머니는 큰 용을 보았다고 합니다. 용은 고향 바로 정면에 자리잡은 지리산의 허공을 감돌고 있었습니다. 이 산은 우리에게 있어 매우 성스러운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용은 산 위의 구름 속에만 머무를 뿐 하늘로 솟아오르지 못했습니다. 용은 상처를 입고 있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이 꿈에 놀랐습니다. 저의 심각하고 중대한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작곡가 윤이상과 독일의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의 대화집 <상처 입은 용>의 첫머리에 나오는 윤이상의 말이다.‘한 작곡가의 인생과 작품에 관한 대화’라는 부제가 붙은 이 대화집이 나온 것은 1977년으로, 그가 독일로 돌아간지 7년째 되는 해다.
윤이상은 독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른바 <동백림사건>에 연루, 한국으로 납치되어 사형을 언도 받고 복역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형 판결은 무기징역으로, 무기징역에서 15년으로, 다시 15년에서 10년으로 감형되었으며, 결국에는 대통령 특사라는 명목으로 석방되었다.
당시 나는 일본어로 번역된 책을 입수해 읽으면서 윤이상과 루이제 린저의 깊은 우정과 그에 뒷받침된 지성적인 대화, 그리고 서울로 납치 당할 때의 정황, 사건의 진상을 말하는 윤이상의 고백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하여,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가 발행하던 동네신문 <코리언뉴스>에 저자의 허락도 없이 번역, 게재한 일이 있었다. <상처 입은 용>을 통해 윤이상이 말하고자 했던 사실, 즉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나 그 동조자가 아니었으며 어디까지나 민족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고, 특히 현대음악 작곡가로서 그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가를 알리고 싶었다.
물론 나는 윤이상이 작곡가로서 지향하고 실천해 온 무조음악, 혹은 12음 음악이 북한 예술의 근본적 이념인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는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1972년 뮌헨 올림픽을 위한 축제 오페라를 써달라는 의뢰를 받고 <심청>을 쓸 만큼 유명한 작곡가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윤이상이 감옥에 갇혀 있을 당시 서독 정부는 물론 전 세계의 양심 있는 문화인들이 구명운동을 펼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현대음악의 기수로 불리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 카라얀을 비롯해 동서양의 문화인들이 구명운동에 가담했다. 당시 거장으로 불리던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항의의 표시로 서울에서의 연주회를 거절하기도 했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 대한 호소문에서, 윤이상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곡가이며 그의 목표는 항상 한국음악의 뛰어난 전통을 서양음악과 연결시키는데 있었다는 점, 그는 그의 예술적 노력을 통해 한국의 사고방식을 유럽에 전해준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루이제 린저와 윤이상은 이러한 구명운동이 한국 정부를 압박하여 결국 조기석방이 이루어졌다고 대담에서 밝히고 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민족주의자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도 북한도 나의 조국이며 거기 사는 모두가 나의 형제이고 나의 동포다.”
<상처 입은 용>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1956년 유럽으로 떠나기 전 윤이상은 한국에서 이미 이름난 작곡가였고, 한국 작곡가연맹의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1956년 서울시 문화상의 수상자였다.
“나는 그때 40세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서양의 음악이론을, 무조음악을, 12음 음악을 배우고 싶었다. 나는 쇤베르크가 속한 빈학파의 음악을 배우고 싶었다. 처음에는 3년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귀국해 교편을 잡을 생각이었다. 사실 3년 후인 1959년에는 짐을 꾸리고 귀국 준비를 끝냈었다.”
그러나, 마침 쾰른에서 열린 세계음악제에서 그의 현악사중주곡이 대성공을 거두고 유럽 악단의 주목을 끌게 되면서 다시 짐보따리를 풀었다. 그때부터 그의 동양 음악의 이미지와 서양의 작곡기법이 어우러지는 독창적인 음악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러던 그가 왜 어느 날 느닷없이 한국으로 납치되어 공산주의자로 규정되고 북한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기 되었을까.
윤이상이 여러 번 북한에 다녀온 것은 사실이다.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63년 4월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평양 근처에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고 싶었다. 이미 사진으로 본 인상을 토대로 교향곡 <적정경>을 작곡했지만, 1500년 전에 그려진 신비스러운 프레스코 벽화의 원화를 직접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 첫 번째 방북이다.
“나는 그해 메이데이를 평양에서 체험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석단의 무대로 끌려가, 마치 내가 그들 중의 한 사람처럼 사진이 찍혔지요. 그것은 오해하기 쉬운 선전 사진이었습니다.”
윤이상은 또“내가 북한에 있는 동안 어떤 사람이 노동당에 가입할 생각이 없느냐고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분명하게‘아닙니다. 나는 음악가이지 정치가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지요.”라고 말했다. 이것은 윤이상과 북한 노동당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에서는 윤이상을 공산주의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윤이상이 풀려나고 상당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음악이 한국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은 음악의 난해함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그에 대한 정치적인 불신감이 아직 뿌리 깊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1990년 윤이상의 주도하에 열린 <민족 통일 음악제>에 다녀왔을 때 나는 윤이상이 북한에서 얼마나 큰 존재인지를 목격할 수 있었다. 평양의 번화가에서도 가장 유명한 고층건물 중의 하나가 윤이상 음악연구원이라는 것도 알았고, 음악회가 진행되는 동안 북한 정권의 예우가 특별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사상과 정치를 떠나 독재자 김일성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전쟁 이후 보잘것없이 쇠퇴한 북한의 서양음악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힘써준 것이 북한으로서는 더없이 고마웠을 것이다. 그러나 국토가 양분되어 각자가 가는 길이 다른 상황에서 이 모든 것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람마다 작곡가 윤이상을 보는 눈이 다를 것이다.
“나는 고향에서 오래된 연못에 낚시나 늘어뜨리며 말년을 보내고 싶습니다. 한국은 나의 고향이고 나는 고향에 묻히고 싶습니다.”
루이제 린저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 윤이상, 그는 이 간절한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1995년 11월 4일 베를린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나는 4년 후 미망인 이수자 여사의 초청으로 이미 동서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무너진 베를린을 방문, 소리 없이 내리는 부슬비를 맞으며 한적한 그의 묘지를 찾은 일이 있다.
이제 윤이상의 음악에 관해서 말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윤이상의 음악을 듣는 일이 별로 없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재미가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지만 이는 그가 영향을 받은 현대 음악, 무조음악, 12음 음악 등 이른바 빈악파 음악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 전문가가 아닌 나의 소견을 간단히 적자면 무조 혹은 12음 기법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협화음이 이어지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종래의 음악이 아름다운 화음에 의한 멜로디와 리듬이 이어지는 것과는 반대다. 아르놀트 쇤베르크를 비롯한 빈악파는 질서정연한 기존의 음악만이 전부는 아니며, 모든 음이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으로 불협화음이 가득한 음악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음악의 영역을 확장하고 음악의 양식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가끔 그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 관현악곡인 <예악> <피리>, 클라리넷 5중주 등에 귀를 기울일 때가 있다. 동양적인 고요하고 편안한 세계가 펼쳐지며 바람소리, 문풍지 소리, 피리 소리, 백호 불사조 거북 용의 네 신이 서로 어우러지는 듯한 조화와 긴장과 환상적인 가락을 들을 수가 있다. 그럴 때마다 살아생전 그의 꿈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상처 입은 용 윤이상, 그는 어머니의 태몽과도 같은 일생을 산 작곡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