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산 (수필가)

곽설리의 소설은 낯설고도 익숙한 감각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소설집 <빨간 거품>은 새로운 문학적 도약을 시도하는 인상을 준다. 소설의 형식이‘스마트 소설’이다. 플래시 픽션의 전형을 보여주는 짧은 이야기 속에 작가의 사유가 밀도 높게 농축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형식 실험을 넘어 문학의 본질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인물의 정체성은 고정되지 않고 서술자의 위치는 유동적이며, 환상성과 동화적 상상력이 도입된 작품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제시한다.
총 열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은 자연, 인간, 예술, 언어, 우주, 신문물까지, 시공간을 넘나드는 다양한 소재를 다룬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독립적인 서사를 지니면서도,‘불안’과‘위로’라는 상반된 감정의 교차점을 공유한다. 작가는 이 교차점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인간이 인간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다. 그 안으로 화자의 심상이 조용히 스며든다. 불안을 느끼고 가엾어하고 분노하고 눈물 흘리며 안도하고 다독이는 모습이 서사 속에 배어있다.
표제작 <빨간 거품>은 이 소설집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낸다. 현실과 가상 세계가 뒤섞인 서사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균열을 감지한다. 붉고, 뜨겁고, 때로는 위태로운 거품.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다. 남자는 로댕의 조각‘생각하는 사람’처럼 몸을 구부린 채 골똘히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 남자가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빨간 거품> 중에서).
현대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을 매개로 내면을 파고드는 작가의 치밀함은 날카롭다. 인종차별과 학폭을 겪은 남자가 빌런들을 차마 죽일 수 없어 선택한 행동들. “아무리 힘들어도 내 힘으로”해결하고 싶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행복하고 싶었던”남자의 내밀함을 드러낸다. 작가의 매서운 눈매는 스쳐 지나가는 일상에서 문학적 진실을 끌어올린다.
<그림 그리는 코끼리>에서 화자는 푸른 코끼리와의 대화를 통해 글쓰기의 본질을 탐색한다. 글이 써지지 않아 고민하는 화자에게 코끼리는 최인호 소설가의 조언을 전한다.
“글을 시작할 땐 일단‘참 이상한 일이다’로 시작하라”고.
이 조언은 단순한 글쓰기의 팁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충동을 드러낸다. 인간은 결국 글을 쓰는 존재 호모 스크립투스(Homo Scriptus)다. 푸른 코끼리와의 대화는 글쓰기라는 행위가 인간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임을 환상적이고 은유적으로 풀어낸다.
<고도 개미>에서는 풀잎 하나가 별들의 운행에 못지않다고 믿는 어느 시인의 사유가 나온다. 이 사유는 곽설리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그녀는 작은 존재의 떨림에 주목한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의 지우지 못하는 아이들 흔적, <내 안의 빈집>에서 아득하게 그리운 내 안의 빈 집 한 채, <거미 여인>에서 거미줄 쪽으로 날아가는 붉은점모시나비의 아찔함, <김 노인과 남편과 오소리>에서 어미 잃은 새끼 오소리의 절규, <그림 그리는 코끼리>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구를 지탱하고 있는 것들에 가닿은 작가의 시선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자연의 경계에서 만나는 존재들을 차용한다. 개미, 거미, 나비, 오소리, 코끼리, 거북이, 두꺼비, 달팽이 등. 하여 작가의 시선이 소외된 미세한 것에 머문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런 존재에 감정을 이입하고 이야기를 길어 올리므로, 그 섬세함이 인간 내면의 고독과 불안 같은 불안정한 심상을 그려내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그래서인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동화적 상상력이 도입된 부분에서는 술술 읽히며 동시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달팽이를 기다리며>라는 소설에서는 고도를 기다리듯 달팽이를 기다리는 이가 있다.“결국 선생님께서는 오시지 않았습니다”로 마무리되는 이 작품은 기다림이라는 감정의 구조를 해체하는 작품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달팽이를 기다리는 화자의 시선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존재의 확인을 향한 갈망이다. 달팽이는 주검으로 나타났으나 선생님이라는 인물은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존재하지 않음’이 남기는 감정의 여백을 농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두껍아 더 큰집 다오>에 등장하는 신인류와 신노마드족. <남자와 여자>에서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역사가 된다는 문장의 잔상. <나는, 당신은 존재하는가>의 스릴 넘치는 장면들. 제로 존을 벗어난 우주선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해의 온화한 무늬들>은 더 이상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인간을 인간이 아닌 클라라의 눈을 통해 보게 되는 이야기다.
열세 편의 초단편 소설은 문장이 간결하고 감각적이다. 시적 이미지와 리듬감 있는 언어는 감각을 자극하며 이야기의 분위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감정 묘사에 과장이나 설명을 피하고 섬세한 언어로 감정을 전달한다. 이러한 문체는 독자에게 몰입감과 여운을 준다.
또한 이 책의 서사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드나들며 해석의 여지를 열어둔다. 상징과 은유를 통해 다층적 의미를 생성하며 독자는 각자의 경험과 감수성에 따라 의미를 구성하게 된다. 이는 롤랑 바르트가 말한‘텍스트의 열린 구조’개념과도 맞닿아 있으며, 곽설리 문학이 독자와 능동적인 소통을 지향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문학은 종종 위로나 공감을 제공하지만, 때론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고 낯선 감각을 남긴다. <빨간 거품>이 그렇다. 익숙한 서사구조나 감정선에 기대려는 독자가 스스로 균형 잡으며, 그 과정에서 독자는 수동적으로‘받아들이는’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반응하는’존재로 전환된다. 즉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독자는 자신만의 독서 리듬을 만들어간다. <빨간 거품>은 그런 리듬을 허용하는 책이다.
짧은 이야기들이 남긴 여백은 독자의 내면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채워진다. 그 여백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이 책은 전혀 다른 얼굴을 갖게 될 것이다.
김추산 수필가
서울에서 태어나 신학과 문예창작학을 공부했다. 이십 대엔 잡지사와 출판사에서 취재, 편집 기자, 편집장으로 일했다. 사반세기 이민자로 살아가며 놓았던 글을 지천명에 다시 시작해 수필 신인상, 단편소설 공모에 입상한 바 있다. 현재 《달라스문학》 책임편집위원, 격월간 수필 전문지 <에세이스트> 편집차장, <주간포커스> 문학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