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張壹淳, 1928년-1994년) 선생은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원주 민주화운둥의 대부로 알려진 큰 어른이다. 사회운동가, 교육자이며 생명운동가, 민중 속의 철학자, 서예가로 김지하 시인, 김민기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장일순 선생은 시대를 내다보는 깊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민중(민족)의 앞길을 제시하고, 시대마다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찾았고, 소임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늘 소외되고 핍박받는 민초들과 함께했다.
선생을 따르던 이들은, 알면 알수록 놀라운 분, 대체 이 분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 짧은 글에서는 일화 몇 가지를 통해 배우고 싶고 따르고 싶은 선생의 한 부분을 살피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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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선생은 지구의 종말을 재촉하는 물질문명 대신 생태문명론을 줄기차게 제시한 생명 생태운동과 협동운동의 선구자였다.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사유하는, 20세기 후반 시대정신의 표상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김지하 철학의 바탕인 생명사상은 장일순의 생각을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오랜 감옥살이로 생긴 정신의 상처를 먹그림 그리기로 치유하는 지혜를 가르친 분이기도 하다.
뒷것 김민기와 장일순 선생
“뒷것 김민기 뒤에 장일순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뒷것의 아버지’또는‘뒷것들의 뒷것’이라는 말도 장일순 선생을 일컫는 말이다.
장일순 선생과 김민기는 깊은 정신적 교감을 나눈 스승과 제자, 혹은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였다. 김민기는 김지하를 통해 장일순을 만난 이후에 선생의 집을 드나들며, 마치‘아버지’처럼 따르며 정신적 지주로 삼고, 극진하게 모셨다고 한다. 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1951년 유복자로 태어난 김민기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늘 사무치게 그리운 자리였다.
김민기의 <아침이슬> 같은 노래와 정신적 지향점(뒷것, 생명)이 장일순의 생명사상, 협동조합 운동과 연결되어 한국의 민중운동과 생명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장일순 선생 또한 김민기를 지극히 아꼈고, 그가 지은 노래의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가사와 우리 정서를 담은 선율을 좋아했다.
“그의 음악의 독창성이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땅을 딛고 있는 두 발에서 나오며, 공동체의 어울림을 가능하게 해준다”면서 흐뭇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늘 부르던 노래가 <아침 이슬>이었고, 술 한잔 걸치고 원주천 뚝방길을 걸어 집으로 갈 때도 <아침 이슬>을 부르면서 술이 깨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장일순이 <아침이슬>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1988년 한살림모임을 준비할 때는“수없이 수없이 긴 밤 지새웠겠지만 그 아침이슬을 겸손하게 배워야 하지 않어.”라는 붓글씨를 직접 써서 김민기한테 선물했다고 한다.
김민기가 군사정권의 엄혹한 감시로 어려움을 겪던 시절 시골에서 농사를 지은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때 생산자인 농부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유통구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1989년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최혜성 등이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한살림모임>을 창립할 때 김민기는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할 만큼 장일순 선생의 측근 가운데 하나였다.
‘앞것’이 되라고 종용하는 사회에서“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조용히 온몸으로 보여준 사람 장일순 선생은 이를 두‘하심’(下心)이라 했고,“기어라”하는 우리말로 표현했다.
그 사람이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 알려면 친구를 보면 된다는 말이 있다. 앞서 말한 김지하와 장호경 신부, 이현주 목사,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 이철수 화백, 소설가 김성동, 김민기를 포함해 김영주, 박재일, 제정구, 리영희가 아니더라도, 사실상 장일순 선생의 측근은‘원주그룹’중에서도 가장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다. 장일순의 친구이며, 제자이며, 후배였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이름이 드러난‘앞것’들을 낳은‘뒷것’들이었다.
장일순 선생은 여러 가지 호를 썼는데, 대표적인 것이 ‘무위당(无爲堂)’과‘조 한 알(一粟子)’이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뒷전에서 할 일 다 하는 자세를 뜻한다. 그것도 모자라 장서각(張鼠角)이라는 호도 썼는데, 장쥐뿔 즉 나는 쥐뿔도 없다, 쥐뿔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장일순 선생의 주된 가르침은“바닥으로 기어라”였다. 앞에 나서서 떠들지 말고, 자신을 낮추라는 말씀… 겸손, 생명 존중, 공동체 사상을 강조한 가르침이다. 김민기의‘뒷것’정신과 바로 이어진다. 그렇게 바닥을 기어서 천리를 가신 어른이다.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고 낮은 곳으로의 삶을 지향했던 김민기의 삶과'사람이 곧 하늘'이고'한순간이라도 하심(下心)을 놓치면 안 돼'라고 강조한 장일순의 삶은 겹쳐지는 대목이 많다.
장일순 선생과 김민기는 의도하지 않았지만‘뒷것’으로 머무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행복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비슷한 마음결과‘뒷것’의 삶을 추구하며 정서적 동질성을 공유했다. 장일순 선생의 말씀 한마디…
“사람이 보이는 것만 너무 하면 재미가 없어. 안 보이는 가운데 생활하는 그런 사람이 좋은 거야”
장일순의 삶과 신앙
풀 한 포기에서도 하느님을 발견하며 생명사상을 일깨우고 떠난 장일순 선생이 뿌린 씨앗은 수많은 곳에서 열매를 맺고 있다.
선생과 가깝게 지내며 <노자 이야기>를 함께 쓴 이현주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자 니체의‘어떤 사람은 사후(死後)에 태어난다’는 말이 헛소리 아니었음을 입증하신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장 선생은 고(故) 지학순 주교와 원주교구의 시작을 함께하며 방향을 설정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들은 먼저 교회 자립운동을 시작했고, 꾸르실료에 기반을 둔 평신도 중심의 교회 쇄신운동을 일으켰다. 영어와 일어에 능통했던 장 선생은 공의회 문헌과 교황 회칙을 읽고 번역해 평신도들과 나눴다.
원주 가톨릭센터 건립에도 문화적 안목으로 힘을 보탰다. 김민기가 작곡한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라는 노래로 시작하는 김지하의 연극 <금관의 예수>가 초연된 곳이 원주가톨릭센터였다.
장일순 선생은 이외에도 신용협동조합의 기틀을 마련했고, 대성학교 설립과 민주화운동, 강원 지역 재해대책사업에 나서는 등 굵직한 일들을 도맡았다. 1980년대부터는 <한살림> 운동을 통해 생명사상을 전개했다.‘걸어 다니는 동학’이라 불릴 만큼 동학사상에 심취한 장 선생은 가톨릭적 기반 위에서 동학의 언어로 생명사상을 펼쳤다. 그에겐 선악의 경계가 없었다.‘조 한 알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고 말할 만큼 모든 생명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했다.
일화 몇 가지
치악산의 상원사에 들렀을 때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이 대웅전의 불상을 향해 합장을 하고 절을 하는 것을 보고 일행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천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째서 불상을 보고 절을 해요?”
장일순이 껄껄 웃었다.
“이 사람아, 성인이 저기 앉아 계시는데 어찌 우리 같은 소인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일순 선생의 혁명에 대한 생각.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때리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만물이 위대한 것입니다. 풀 한 포기에 대한 존경심이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사라져버리는 그러한 것으로는 곤란합니다.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또한 한 포기의 풀과 같이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본래 전부 위대한 것입니다.”
1992년에 방영된 TV 프로그램의 한 장면.
그때 장일순 선생은 위암 진단을 받고 치료중이었다. 암에 대해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자연도, 지구도 암을 앓고 있고, 자연 전체가 암을 앓고 있는데 사람도 자연의 하나인데 사람이라고 왜 암에 안 걸리겠어요. 그러니까 큰 것을 나한테 가르쳐주느라고, 결국은 지금 뭐냐 하면 너 좀 앓아봐라 하고 그러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잘 모시고 가지요.”
하나의 풀이었으면
스스로에겐 엄격하고 솔직하면서 남에겐 한없이 너그러웠던 장 선생은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길 극히 꺼렸지만, 선종 당시 3000여 명이 조문하며 그를 기렸다.
선생의 유언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마라”는 말씀이었다.
원주에 있는 장일순 선생 묘소 앞에 세워진 작은 시비(詩碑)에는 무위당이 남긴 한 마디가 새겨져 있다.
하나의 풀이었으면 좋겠네
차라리 밟아도 좋고
짓밟아도 소리 없이
그 속에 어쩌면 그렇게
참고문헌
인터넷에서 장일순 선생에 관해 검색해 몇 편의 글만 읽어보아도 그분이 우리 시대에 되짚어 볼 큰 어른이란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장일순 평전> 한상봉, 삼인, 2024
<장일순 평전> 김삼웅, 두레. 무위당사람들 감수, 2019
<무위당 장일순> 무위당좁살만인계 엮음
<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 1997
장일순 선생의 서화와 일화를 엮은 <좁쌀 한 알> 최성현, 도솔 외 다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