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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떠올리면 그 사람이 가진 성격과 삶의 궤적에 따라 기분이 밝아지는 사람이 있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사람이 있다.

   당연히 세상은 밝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나 후자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온전히 그들만의 몫일까?

   내겐 아픈 손가락 같은 두 살 터울의 언니가 한국에 있다. 또래의 자매들은 자라면서 많이들 싸운다고 하던데, 언니와 나는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다.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에 말수도 적어서 시빗거리가 생기지 않았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오랫동안 포목점을 운영해온 부모님은 바쁠 때면 어쩔 수 없이, 시골에서 올라온 처녀들을 가정부로 들여 집안 살림을 맡기시곤 했다. 그러다 형편이 여의치 않을 때면 다시 내보내게 되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빈자리는 항상 언니가 채웠었고, 나중에 형편이 나아졌음에도 그 자리는 계속 언니의 몫이었으며 나와 부모님 또한 그걸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그 긴 시간, 언니는 한 번도 불만을 표한 적이 없다.

   조용한 성격에 어울리게 언니는 학창 시절부터 붓글씨와 도예에 수준급의 실력이 있어서 서예 전국 대회에 입상하고 전시회도 여러 번 했으며, 지금도 틈만 나면 찻잔과 그릇을 멋들어지게 만들곤 한다. 언니의 실력이 아까워 비즈니스로 연결해보길 몇 차례 권유했으나 딱, 거기까지. 그건 자기 몫이 아니란다.

   내 첫째 딸아이 돌잔치 때, 일만 벌여놓은 동생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엄마를 대신해 며칠 동안 많은 음식과 손님 상차림을 도맡아 너끈히 처리해준 언니의 수고는, 지금도 생각하면 참 고맙다.

   그랬던 언니가 자신의 둘째 임신 때, 그 불편한 몸으로 시집의 가을 김장 담기를 돕다가 갑자기 진통이 와서 가까운 동네 산부인과로 달려갔으나, 몸을 무리한 탓에 결국 조산하게 된다.

   그런데 아기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본 의사는 거기서 7~8km 떨어진 대학병원으로 긴급 이송하게 하지만, 그때부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 무책임한 의사는 탯줄만 겨우 자른 조산아를 담요에 말아, 지쳐 있는 산모에게 안기고는 119 긴급차량이 아닌 일반 택시를 불러 간호사 1명과 함께 대학병원으로 보내버린다. 저녁 퇴근길의 교통 체증 속에 아기의 호흡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1시간을 넘겨 도착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의 긴급조치를 시행하는 젊은 의사의 표정엔 난감함이 역력했다. 다행히 호흡은 돌아왔으나, 결국 장시간의 무호흡으로 인해 산소 결핍에 의한 두뇌 손상이 장애로 이어질 수 있음을 통보받는다.

   동네 산부인과 의사의 무책임한 의료 과실임을 인지하고, 자료 준비와 법적 대응을 준비할 것을 언니 가족에게 권유하고 수차례 권고하였으나, 언니 가족의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항변은 이미 의료 과실에 대해 병원 측과 변호사들의 잘 준비된 그들만의 일방적인 야합만 확인한,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다를 바 없는 무모한 일이었다.

   결국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내 조카는 보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말을 할 수도 없는 뇌병변 1급 지체 장애자가 되어 버렸다.

   우리 가족이 이민 온 지 25년, 서른이 된 그 아이는 여전히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먹이고, 씻기고, 기저귀 가는 등 모든 것을 떠맡아 고행 30년을 해온 나의 언니는, 그 건강하던 모습에서 60고개를 넘기고부터 온몸이 성한 데 없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가끔의 한국행 때 보게 되는 익숙한 장면. 병원 갈 때나 외출 시, 성인용 휠체어를 힘겹게 밀며 언니의 입에서는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를 수십 번씩 달고 산다.

   그걸 지켜보는 게 괴롭고 답답해, 왜 형부와 부담을 나누지 않느냐며 화를 내면, 일하는 시간 외에는 등산 다니느라 바쁘다며 덤덤한 얼굴로 말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서 과장 근무하는 첫째 조카를 참 자랑스러워 했는데, 두어 번의 연애가 무르익어 혼담이 오갈 무렵, 중증 장애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결별을 통보 받고는 지금은 결혼도 포기한 것 같다고 말하는 언니의 표정은 참 슬퍼 보였다.

   기대와 설렘의 한 번씩의 한국행이지만, 언니를 만나는 일은 항상 속이 상하고 편치 않다.

어릴 때부터 내 성격, 내 투정 다 받아준 언니지만 지금의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며칠 전 일이다. 외출을 마치고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서 언니의 안부 전화를 받는다. 최근 장애 조카가 아파서 병원에 갔었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어떠냐고 물었더니, 지금은 괜찮아졌다는 말과 일상적인 근황을 주고받고 전화를 끊었다.

   아니, 끊은 줄 알았다. 내가 한숨을 쉬며 “중증 장애인들은 오래 못 산다던데, 지는 힘들지 않나? 이제 그만하고 좀 갔으면 좋겠다,”라고 내뱉었는데, 전화기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린다. 미처 끊기지 않은 전화 너머로 나의 푸념을 들은 언니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 속상함과 난감함은 지금도 화끈거린다. 그 후 남편이 장문의 카톡으로 언니를 위로하고 설득해서 그 상황은 겨우 넘겼지만, 그 미안함에 열흘이 넘도록 전화를 못 하고 있다.

   피폐해진 마음과 아픈 몸으로 기대할 어떤 희망도 없이 저 고난의 행군을 계속해야 하는 언니의 숙명. 그러나 이 모든 건 밖에서 보는, 객관적인 나의 생각일 뿐이다. 언니가 어떤 마음으로 저 고난을 극복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인생은 고해의 바다라고 했는데, 타인과의 상대적 비교라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지혜, 또는 견고함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언젠가 언니와의 통화에서, 보호사에게 아이를 맡기고 좀 늦게 들어왔더니, 아이가 엄마 온 것을 인지하고 좋아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더라며 웃으며 좋아하는 언니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아! 언니는 견고한 자기만의 세계가 있구나’라고 문득 깨달았다.

   내가 만나 뵙는 분들의 처해 있는 난관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게 내 비즈니스 때문만은 아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