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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우체통에서 빨갛고 파란 항공우편을 꺼내드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 달에 두 번씩 한국에서 보내오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는 사람은 아마도 이 세상에 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여섯 형제 중에 나만 혼자 미국에 와 있으니 당연히 아버지의 연서(?)를 독차지 할 수밖에. 그런 면에서는 행운이지만 부모를 가까이에서 못 모시고 있다는 자체가 불효인 것은 분명한 일이다. 

  우리 아버지는 지금 95세이신데, 28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쭈욱 혼자 사시다가 수년 전부터 큰아들네와 함께 살고 계신다.

  아버지의 취미는 일기 쓰시기와 편지 쓰기이다. 내가 미국에 온지 올해가 40년이 되는데, 맏딸인 우리 집을 여덟 차례 방문 와 계셨던 기간을 빼고는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편지를 거르신 적이 없다. 항상 편지 서두에“이번 편지가 몇 회째다”를 꼭 적으셨다. 

  오늘 받은 편지에는 942번째라고 적어놓으셨다. 딸에게서 받은 편지는 318번째라고 하시니, 아버지가 보내신 편지의 삼분지 일 수준이다. 

  어머니가 안 계신 적적함을 딸에게 편지 쓰시는 일로 소일하시면서, 한국에 사는 5남매의 근황 이야기며 일가친척 대소사 일들을 아주 소상히 적으셨다. 딸이 미국에 앉아서도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 알고 지내도록 하셨다. 

 

  지금부터 12년 전 아버지가 첫 증손녀 돌잔치 보러 오셔서 일주일쯤 지날 무렵 갑자기 다리가 부어오르면서 통증을 호소하셨다. 통풍이 온 것인데 약을 한국에 두고 오셨다고 하셨다. 우리 집 오실 때마다 먼저 뒷마당에 무성한 나뭇가지부터 전지하시던 아주 건강하시던 분이셨는데, 갑자기 편찮으신 모습을 뵈니 당황하여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랐다. 엘에이 공항에서 아버지가 휠체어 타신 모습을 처음 뵈었다. 

  인천공항에서 막내아들 등에 업혀 가셨다는 이야기를 여동생한테 들었다. 얼마 후 안정을 취하신 아버지와 통화를 하는데, 갑자기 편찮으신 아버지를 그냥 서둘러 보내드린 죄송함과 죄책감이 엄습하면서 대성통곡, 온몸이 떨리고 가슴이 미어졌다. 미국 딸집에 오시는 것을 그리도 좋아하셨는데, 아버지와 통화하면서 그렇게 울음보가 터져 나올 줄이야!

  “이번 편지가 942번째 보내는 글월이구나! 올 여름 우리나라는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는 이상한 날씨가 계속되어 가마솥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나날들이다. 내 나이 90평생 장마 겪어보지 못한 해는 처음인 듯싶다. 그러니 금년 여름 더위가 얼마나 극심했는가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며칠 전에 우리가 사는 가양동 동회에서 기별이 오기를 70세 이상 노인을 상대로 치매조기검진을 받으라는 안내문이 와서, 동사무소에 가서 치매 검사를 받았다. 검사결과 100점 만점에 100점 받았지! 만점 받은 이에게는 축하 선물로 흰색 양말 한 켤레 주길래 받아다가 손녀 주라고 며느리에게 건넸다. 

  어떤 할머니는 자기도 선물 달라고 조르고 있다마는 만점 받은 이에게만 드리는 선물이라고 막무가내로 주지 않더라. 심사관 물음에 대답 못하는 노인들이 다수 있어서 놀랐다. 나는 치매에 자신이 있어서 검사할 때 그다지 놀라지 않았지. 

  조석으로 아들 며느리에게 대접 잘 받고 있어서 내 생활하는데 아무 불편 없으니 흐믓하구나! …(중략)…

  내 소시 적과 비교하면 요즘 세상은 너무나 사람 살기 좋은 딴 세상이 되어 있구나! 내 나이 비록 많이 늙었지만 조금만 더 이 좋은 세상을 누리다가 선선한 계절에 떠나련다. 

  어멈 네 일가 모두에게 늘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하며... 

  먼 곳에 살고 있는 사랑하는 딸에게 아버지로부터.

  2019년 8월21 새벽에 쓰고 오후에 우체국 가서 부침”

 

  40년 동안 받아 온 아버지의 편지. 이제 942번 째 편지를 받았으니 58번 더 채워서 천 번째 아버지의 편지를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아버지의 편지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는 그날, 그 동안 아버지께 받았던 편지들을 부여잡고 통곡할 것이 분명하다. 가슴 미어지는 후회를 덜 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천 번째 편지 받는 날을 축하할 즐거운 궁리를 지금 시작해야겠다. 

  수없이 많은 사랑의 편지로 딸 가슴에 영원히 살아 계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안 계신 세월을 겉으로는 꿋꿋하게 살아 오셨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생각하니 죄송스럽기만 하다. 

  천 번째 편지를 넘어서 이 딸이 아버지의 편지를 더 오랜 세월 받아 볼 수 있게 부디 만수무강하시옵소서!

 

<필자> 고희숙 님은 이화여대 도서관학과를 졸. 에브리데이교회 시니어 칼리지 문예반에서 글쓰기 공부 **에브리데이교회 시니어 칼리지 문예반(지도: 윤금숙 권사) 제 3 문집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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