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아직 초저녁인데 어디선가 명쾌한 웃음소리들이 들려왔을 때, 나는 그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줬다. 바로 저런 웃음이 우리 이웃에 골고루 번져 나갔으면 하고…
내게도 아직은 웃음이 남아있는가? 김형석 교수는 그이 에세이집 [고독이 머무는 계절]에서 고독은 참과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물레라 했는데…우린 이렇게 꼼짝 못 하고 갇혀 사는 것 같아도 외로울 순 없지요. 우리에겐 정다운 이웃이 있고, 소중한 가족들이 있어 서로 기댈 수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요.
며칠 전 마켓에 갔을 때의 얘기다. 저만치 날 피해 가는 그분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어도 분명 내가 아는 분인데. 그는 나를 모른 채 피해 가는 것 보고 조금은 서글픔 같은 걸 느끼게 했다. 코로나19가 온통 세상을 뒤엎어 놓더니 사람들의 맘마저 굳어지게 만들어 버렸구나.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돼 버렸는지…
우린 그동안 허물없이 끈끈한 정으로 살아왔는데, 그것이 우리들의 자랑거리였는데… 그러나 내 이웃은 아직은 그런 경계가 없고 거리감이 없이 좋다. 만나면 잔잔한 웃음이 있어 좋고 가벼운 목례라도 하고 지나가는 그 미소를 보면서 아직은 맘들이 메마르지 않아 정들을 간직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해 봤다.
요 며칠 여기저기서 벗님들의 안부를 묻는 전화가 걸려 왔다. 어떻게 그 지루한 시간들을 견디며 사느냐고 무료 하거나 답답하고 힘들진 않느냐고…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난 그 긴 시간들이 내겐 별로 지겹거나 지루하다는 생각 않고 이렇게 잘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따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분들의 모습들이 스쳐간다. 늦었지만 안부라도 드려야겠다.
모처럼 밖에 스쳐가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열었다.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지는데 그 낙엽은 곧 음악이 되어 나로 낭만을 느끼게 하고… 오랜만에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오늘은 옛날로 돌아가 제자들과 함께 즐겨 부르던 여러 가곡 중에서 김연준 선생의 [청산에 살리라]가 부르고 싶다. 나지막하게 조용히 불러 본다. 내 나이 이제 90세를 바라보는데 옛날 같은 소리가 나 올 리 없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불러보니 한결 마음이 시원해지면서 몇 번을 불러봤다. 내가 아직도 이렇게 이 땅에 머물러 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사실 나는 평소에 텔레비전을 잘 안 보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은 한국 뉴스가 궁금해 TV를 켰더니 집채만 한 큰 파도가 덮치고 있었다. 쉼 없이 몇 번이고 또 다른 태풍이 밀려와 하늘에서 물 폭탄과 폭풍을 몰고 와 그 엄청난 위력으로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할퀴고 휩쓸고 지나간 자린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초토화 돼 버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이제 우린 불안 같은 것 불편했던 맘까지도 미워했던 맘, 아직도 날 짓누르고 있는 것들을 죄다 떨쳐버리자. 모두 접고 묻어 버리자. 우린 이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살면서 얼마나 행복한가. 어디 감사할 일이 한두 가지 인가? 비록 지금은 악명 높은 코로나19로 어렵고 힘들다 하지만 시인 천상병 씨가 그의 시 [귀천]에서 노래했던 그 아름다운 세상에 우린 살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편협하고 옹졸했던 맘 아직도 남아 있다면 다 흘러 보내 버리자. 우울했던 맘까지도… 지금은 답답하고 어둡고 침침한 터널에 갇혀 있는 것 같으나 얼마 안 있으면 저 눈부시고 찬란한 태양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우리 함께 손잡고 달려 갈 텐데.
10월이 눈 앞에 다가 왔다. 얼마나 좋은 계절인가? 연말까지 기다리지 않고 여기 저기서 깜짝 놀랄만한 좋은 소식들이 터져 나 올 것만 같다. 그날이 오면 우리 모두 꽹과리 치며 신나게 한번 굿판을 벌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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