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네요/ 춥진 않은가요/ 밤 깊어 문득 그대 얼굴이 떠올라…
창가에 음력 8월 보름달을 옆에 걸어 두고 <바람이 부네요> 노래를 듣는다. 지난여름 일흔일곱으로 작고한 한국 재즈계의 대모 박성연 씨의 노년에 취입한 허스키한 목소리.
소리는 귀로도 듣지만, 가슴으로도 듣는다. 젊었을 때의 찰진 목소리가 세월을 건너며 바람에 묻혀온 쉰 소리로 가슴을 휘젓는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군 부대에서 재즈와 인연을 맺은 그녀는 이후 숙명여대에서 작곡을 전공하여 그녀만의 음악 세계의 폭을 넓힌다. 모교에서 교수직을 제안 받았으나 마다하고 신촌에 재즈클럽 <야누스>를 열고 평생을 가난한 재즈 가수로 살았다.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평생을 껴안고 살았으니 그보다 더한 축복이 있을까.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끼리 같이 가다 보면 허기에 메이진 않았으리. 어깨와 어깨만 맞대어도 따뜻했으리.
마음을 열어요/ 그리고 마주 봐요/ 처음 태어난 이 별에서/ 사는 우리 손 잡아요.
이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잘 익은 시 한 편 듣는 것 같아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인다.
산다는 건 너, 나 할 것 없이
다 같은 것인지 나는 이 시를,
이 목소리를 깊이 끌어안으며
나도 밤 깊어 문득
그대 얼굴을 떠올린다.
창가에 머물던 달이 중천으로
옮겨갈 즈음 나는 다시 음원을
옮겨 클릭한다.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르는 <삶에 감사하며(Gracias A La Vida)>.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민중가수다. 한국의 김민기 같은.
신은 나에게 흰색과 검은색의 두 개의 별을 주셔서 완벽히 색을 구별하게 하셨고
나에게 들을 수 있는 귀와 소리와 언어를 주셨으며
신은 나에게 걸을 수 있게 하셨고 나에게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주셨습니다.
신은 나에게 웃음과 눈물을 주셔서 부서지는 고통 가운데서도 행복을 봅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기타 반주를 하는 사람 옆에 다소곳이 앉아 속삭이듯 읊조리는 모습은 대중을 향한 노래라기보다 신께 드리는 기도문 같다. 유튜브 영상에 비친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전통의상인 판초와 흡사한 가우초를 걸친 수더분한 동네 아주머니 같은 인상을 주었다.
저런 분이 군부독재 정권에 맞서는 노래를 하다가 핍박을 받고 추방되기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평생을‘침묵을 위한 다수의 목소리’라는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이라는 저항 음악에 동참한 가수였다
양팔을 벌려 두 손을 치켜 올리는 간절함과 두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포개며 하늘을 우러르는 모습으로, 신앙고백 같기도 하고 기도문 같기도 한 <삶에 감사하며>를 들으며 나는 그만 그렁그렁 눈 속이 흐려진다. 추석 음식 한 점과 한 잔 곁들인 청주에 그만 여려진 탓일지,
그라시아스, 감사의 언어는 굵고 우렁차게, 삶을 뜻하는 나 비다는 애소를 띈 메르세데스의 기도문에 편승한 탓일지. 그도 아니라면 굽이굽이 준령을 넘어 온 인생살이에’감사‘의 의미를 새삼스러우나 새롭게 인식하게 해 준 메르세데스의 가슴으로 올리는 고백성사에 동화된 탓일지.
그녀의 심령고백이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밭을 정화해 놓는다. 거칠고 황폐한 땅을 헤집고 살아온 피곤한 영혼을 그래도 삶은 축복이라는 당위성을 일깨워주며 위로하고 있으니.
책을 덮듯 음원을 끄고 뜰에 나가본다. 밤이 깊어 보름달도 정수리 위를 벗어났다. <바람이 부네요.> 익어가는 가을밤에 들어보는 그리움의 노래와 <삶에 감사하며>를 통하여 달 밝은 가을밤에 비친 세상 만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우치게 한다.
편하다.
정신없이 살아온 지난날이 꿈만 같다. 그때는 이런 날도 오리라는 것을 몰랐다. 때 되면 쉬는 날도 오리라는 것을.
천길 벼랑 끝에 서 있었던 막막함도 바람 잘 날 없었던 얽히고설킨 인생사를 견뎌 낼 수 있었던 것도 신의 전능하신 돌보심이 없었다면, 오늘 성한 몸과 마음으로 맑은 달빛을 대할 수 있었을까.
나의 오랜 기도 제목은 오직 하나‘내게 평화를 주소서.’이 한 문장의 기도문이었다
멀고 긴 시간이 흐른 후 맞은 기도의 응답. 다시 젊은 날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한들 지금의 이 고즈넉한 평화와 맞바꿀 수 있을까. 오늘 내 생이 끝난다고 해도 더는 미련 없이 지금의 이 평화가 소중하다.
바람이 부네요. 춥지 않으신가요.
밤 깊어 문득 그대 얼굴이 떠올라…
달빛 가득한 뜰에 팔짱을 끼고 서서 흥얼거려본다. 문득 그리워지는 얼굴. 추억은 기억만으로도 아름답다. 그녀도 처음 만난 이 별 어딘가에서 평화로우시라.
그리고 메르세데스 소사의 음성 살아 있음에 감사.
이 밝고 깊은 가을밤 키 큰 느티나무 옆에 기대어 하늘을 본다. 감사한 것이 전부인 이 우주.
Grasias A La Vida Grasias A La Vid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