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아버님 장례식 날이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민지는 몸도 마음도 천근만근이다. 가슴 한복판에 커다란 돌멩이가 얹혀 있는 것 같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법적으로 어엿한 아버님의 부인인 여자가 걸림돌이 된 것이다.
민지의 남편은 그녀가 아버지와 함께 산 세월이 근 20년이니 부인으로 예우를 해주어야 한다고 조심스레 주장했다. 하지만, 시누이 셋은 반대를 했다. 큰시누는 팔팔 뛰면서 완강히 반대했다. 부고에 이름도 넣지 말아야 하고 장례식에서도 절대로 부인 예우는 안 된다고 강경하게 우겨댔다. 입관식, 장례식 순서지에도 이름을 빼라고 했다.
민지는 안다. 왜 저렇게 방방 뛰는 건지··· 아버님의 재혼 당시, 그리고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도, 큰시누는 재혼 사실을 비밀에 붙여야 한다고 당부를 했으니까.
아버님의 부인데도 불구하고, 그분은 가족 누구로부터도 ‘어머니’라고 불리운 적이 없다. 아이들이 할머니라고 부르니 모두들‘할머니’라고 불렀다, 아들도 며느리인 민지도, 딸들도 사위들도, 심지어 남편인 아버님까지도 그렇게 불렀다.
공교롭게도 큰딸과 그녀는 동갑이다. 법적으로는 어엿한 모녀지간이지만 둘은 나이가 같다. 둘 다 78세이다. 모녀를 동갑으로 만든 주인공, 한 여자에게는 남편이요, 또 한 여자에게는 아버지가 되는 바로 그 남자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남자는 100년이라는 한 세기를 꽉 채우고 고요히 눈을 감았다.
결국, 딸들의 의견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어, 가족사항 맨 윗줄에 올라야 할, 미망인 아무개라는 이름은 아예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니 못했다. 그야, 큰누나가 집안의 가장으로서 동생들을 다 공부 시켰고, 공부 욕심 없는 자신을 등 떠밀어 박사학위까지 따게 해주었으니 우기지 못했을 것이다.
누나 셋에 막내인 아들은 워낙에 발언권이 없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무슨 소식이든 간에 항상 맨 꼴찌로 접한다. 똑똑한 세 누나에 치어서 뭐든지 항상 꼴찌다. 그러니 며느리인 민지는 오죽하겠는가? 하느라고 해도 무시당하는 기분에 발칵발칵 화가 날 때도 많으나 입도 벙긋 못 하고 산다.
모든 일은‘아버님의 여자’인 그녀가 없을 때 진행이 되었지만, 나중에 결과를 알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영주권도 없이 그냥 미국으로 굴러 들어와서, 아버님과 결혼함으로 시민권까지 획득하고, 모든 베네핏도 받고 있고, 더구나 큰시누로부터는 매달 용돈도 듬뿍듬뿍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는 그렇게 잘하던 큰시누가 돌아가신 후에는 완전히 돌변을 한 것이다.
어머님 돌아가시고 채 1년도 안 됐을 적인데, 하루는 아버님이 결혼을 해야겠다고 말을 꺼냈다. 물론 딸들도 아들도 강력히 반대를 했다.
“지금 도우미 아줌마가 하루 종일 돌봐드리고 있고, 효부 며느리가 가까이 살면서 자주 드나들고 있는데, 뭐가 부족하세요? 그만함 복 많은 줄 아세요.”
효부? 의무에 얽매어 하는 행위도 효부라고 할 수 있을까?
아버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데도 큰딸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언성까지 높아졌다.
“남들이 알면 뭐라 그러겠어요? 집안 망신이에요. 집안 망신! 자식들 얼굴에 똥칠하고 싶으세요? 그 연세에 결혼은 무슨 결혼이에요?”
그때 아버님은 82세였다.
아버님은 강력했다. 외로워서 못살겠다는 것이다. 혼자 자다가 밤에 죽을까봐 무서워서 죽겠다면서 큰 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왜 내 나이가 어때서? 나이 많다고 맘도 늙은 줄 아느냐? 내 맘은 아직도 이팔청춘이다. 이팔청춘--- 이팔청춘이라구---”
세 번씩이나 이팔청춘을 외치며 뒷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이팔청춘? 이팔이든 팔이든, 그 답은 십육이니 맞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하나 거꾸로 하나 청춘은 청춘이니까.
민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한번은 아버님 모시고 마켓에 갔었는데, 거기서 웬 여자를 만났다. 아버님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셨고 그 여자 역시 엷은 홍조를 띠며 표정이 환해졌다. 이팔청춘이 무색하리만치 두 사람은 새파랗게 젊어 있었다.
아버님은 어쩔 수 없었는지 며느리인 민지에게 다 털어놓으면서, 절대 비밀로 하고, 너만 알고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민지는 상대방의 말은 일단은 다 잘 들어주는 성격이라 아무런 대꾸 없이 “네. 네” 했었다.
82세 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버님은 정신도 총명하셨고, 자세도 꼿꼿했으며 얼굴도 70세 못지않게 젊어 보였었다. 눈도 귀도 다 밝았다. 돋보기 없이 신문을 줄줄 읽을 정도였으니··· 더구나 말씀도 잘하시고 매사에 박식하셨다.
장례식에는 그녀가 나타날 것이다. 아무리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이 큰딸이라 하더라도 장례식에 오지 말라는 말까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타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차라리 안 오면 얼마나 좋을까?
일찌감치 도착한 민지는 깜짝 놀랐다. 입구에서부터 엘에이 꽃집의 꽃이란 꽃은 다 동원한 것처럼 화환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널따란 장례식장 가장자리까지 빈틈없이 화환들이 들어차 있었다.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새까만색 정장을 한 그들의 모습에는 귀티와 부티가 줄줄 흘렀다. 목에도 귀에도 보석들이 주렁주렁 걸렸다. 장례식이 무슨 상류사회 사교클럽 파티인 줄 아나?
잘나가는 세 딸들의 위력이다. 아마도 큰딸의 영역이 가장 클 것이다. 그녀는 인맥을 아주 잘 관리한다. 명예와 체면에 목숨을 건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체면이 그렇게도 중요한가?’ 민지는 속으로 조용히 투덜거렸다.
큰시누는 자기 동생들에 비해 외모도 학벌도 훨씬 뒤떨어지는 올케 민지를 부끄러워한다. 그것도 그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일까?
조의금은 모두 그녀에게 주기로 정해졌다. 큰딸이 낸 방안이다. 참 잘한 결정, 마땅한 결정이다.
그러나 장례식장 입구에는 “조의금은 정중히 사절합니다.”라는 커다란 팻말이 서 있었다.
장례식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민지는 계속 눈길을 멈추지 않고 ‘제발 오시지 마세요. 오시지 마세요.’하고 입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