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한 달 간 두 권의 읽고 있던 책을 끝내고, 장소현의 짧은 이야기 모음<철조망 바이러스>를 읽게 되었다.
<철조망 바이러스>의 교감은 명치끝을 울리며 한국인임을 타종한다. 시집에서 희곡에서 <문화의 힘>에서, 어떤 글에서든 한국인을 뼛속까지 침잠하게 한다. 글을 읽다보면 읽는 즐거움보다 그 속에 선명한 한민족의 격동기 역사와 정한이 배어있다. 떠나온 조국의 숨결과 한국인의 민낯을 이민자의 생활터전인 미국과 연결하어 슬픔과 웃음으로 해학적 이야기 거간꾼으로 풀어 나간다.
<철조망 바이러스> 넷째 마당까지를 읽으며 웃고 해찰하고, 겁나게 서럽고 가슴이 뜨겁다가 냉기가 전신을 파고들기도 하고 먹먹했다. 우리의 국토는 분단이라는 철조망 살벌한 금이 그어져 있는 냉혹한 현실이다.
첫째 마당: 내 친구 발명왕
작가는 멋진 친구가 있어 살맛과 술맛이 남다르다. 수면을 위한 시와 음악 배경의 CD를 만들겠다고 시를 달라는 친구와의 구수하고 부담 없이 마음을 느슨히 풀어놓는 이야기, 어수룩하다는 발명왕의 시평이라니, 이 친구 정말 시를 아는지 며칠 후 <잠 부르는 시 음반>을 들고 나타났는데… 아이구야! 이상의 오감도가 20편 속에 들어있다니, 과연 들으니 졸립긴 졸립다는 웃지 않을 수 없는 발명왕의 인류 평화 공존에 <오감도>라니,
친구의 발명은 선음기, 골라 듣기, 견물생심 차단기라는 인류 평화가 오고, 세상이 획기적으로 아름다워질 것이라는 특수 모자를 쓰며 삐삐 사지마! 소비가 미덕인 세상 업자들이 망한다고, 에잇 빌어먹을… 웃픈 이야기 밑자락은 웃음과 슬픔이 공존한다.
철조망 바이러스에서 붉게 타는 노을을 보고 마시는 술 한 잔의 애수, 조국의 삼팔선의 철조망을 갉아먹는 바이러스를 발명해 엄혹한 군사정권 시대에 일어난 사건, “오마니 때문에 풀려났지” 분단과 이산의 그리움이 배인 아픔이 차오르는 글이다.
“꿈 꿀 자유라도 있어니 감지덕지, 어카겠소, 나같이 힘없는 꿈꾸러기가?”
신조어 자동번역기, 친구 발명왕은 언어의 천재이다. 기발 폭소 연발이다. 한 꼭지만 적어 본다. “솔까말 졸라 후지지” 솔직히 까놓고 말해, 낄끼빠빠 낄데 끼고 빠질 때 빠진다. 이민 와서 사노라 웃음까지도 뼛속에 감추어둔 차가운 웃음이 따끈한 폭소로 창궐한다.
발명왕은 특수한 십자가, 인공지능 감시지능까지 과연 천재적이다. 암 탐색 기동대라니, 순진한 발명왕은 노을 붉은 태평양 바다 너머 조국이 그리워서 오마니가 그리워 나온 발명품인가 보다.
궁금대감, 외로움은 무게냐? 부피냐? 문학과 철학은 궁금증으로부터 시작이다. 쓸쓸한 산술대감과 산술대감의 숙제에서 참으로 진지한 글을 가볍게 읽을 수가 없었다. 인간사에 숫자놀이와 떨어져 살 수 없다. 당뇨수치, 혈압수치, 연봉액수, 평균수명, 어쩌면 인간은 한평생 숫자놀음으로 살다 죽는 것 같다.
웃자고 한 소리에 또 박장대소! 코로나 19라는 이름을 코로나 18로 했으면 아마 한국에 못 왔을 것이다. 아무리 바이러스라지만 욕먹으면 자존심 상할….경제 사회 기타 등등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숫자놀음에 푹 빠져 아이러니하다 못해 시니컬하다. 관습, 풍자, 오류! 아, 이놈의 세상 숫자에 목이 감겨 살았구나…
둘째마당: 살벌한 금,
참 곱구나, 함께 보는 노을, 가슴 먹먹히 읽어내려 가다 함께 실린 사진과 글이 오버랩 되어 온다. 나무 가지가 따로 죽죽 뻗지 않고 서로 엉킨 것이 한 핏줄 동포라고 말하는 것 같다.
분단이 한이 되는 삼팔따라지들의 그리움이 노을 되어 탄다. 웬수도 한 형제니 통일만 되어 새처럼 날아가고 싶은 저 쌓인 통한이… 저 살벌한 금, 비벌리힐스의 화약 냄새, 나성에 와서도 그날의 포성이 들린다. 전쟁의 그 악몽,
새롭게 태어나기, 원로시인의 신춘문예 낙방으로 떨어져도 붙어도 다 망신이란 시인의 성찰이 문학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연륜으로 원로가 되어선 안 된다. 에밀 아자르의 공쿠르 상을 얘기한다. 젊은 시절에 읽은 <자기 앞의 생> 모모, 뜨거웠던 반란, 그래 나이보다 연륜보다 처음처럼 새롭게 빈 마음에 청량한 바람 한 줄 허공에 획을 긋듯 새롭게 시작하자. 그래서 우린 독서를 하며 깨닫기도 하지,
셋째마당: 그 위에 서셨으니,
그의 하루, 그 긴박한 현실과 길 위에 서셨으니, 자코메티의 조각을 닮은 산문, 예수의 어릿광대,“오늘은 이미 순교자의 시대가 아니다. 다만 패배자만 있을 뿐… 종교는 번창해도 믿음은 없는… 그 누가 십자가를 지랴” 위의 작품 세 편을 압축한 글이다.
전상도 사람, 경라도 사람, 남가주에서 영호남 축구 친선대회, 한국의 지방색이 선거철이면 더 확실해지는데 이곳 미주 동포는 전라도와 경상도가 하나되는 다정한 이웃이고 한 동포인 것을! 유쾌 발랄한 상큼 달달한 산문이다.
시험타령, 유쾌한 길길도사, 미대 가요합창단, 작가의 대학 청년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글에서 전혜린, 이덕희와 더불어 학림다방 나무계단이 생각난다.
넷째마당: 나는 결국 죽었다.
카프카의 <변신>처럼 나는 죽었고 의식은 살아 있다. 생과 사를 넘나들다 죽고 살고도 백 달러짜리 종이의 양면처럼 뒤집는 재미있는 글쓰기에 나도 모르게 스르르 빠져들었다. 나도 죽어 내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쓰담쓰담 울음을 달래는 착각에 빠져 본다.
죽음의 철학적 깊은 사유보다 그 죽음을 관조하며 허망한 죽음으로 끝내고 싶지 않은? 그럼 어떤 것이 숭엄하게 죽는 것일까? 우리말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 오십가지가 넘는다니 죽음을 은유하는 말이 작가의 혜안이 그저 재미를 넘어 독자를 끌고가는 게 정말 숨넘어가게 만든다.
살다 죽다 다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죽겠다고 살아나신 작가의 죽음학에 대한 기고만장한 글에 인간의 오욕을 다 놓고 평화롭게 죽기 위해, 우리는 글을 통해 남은 생을 재정비하라고 한다.
삶의 다른 말, 첫 시작은 이렇다. 삶의 다른 말이 외로움이라는 거… 이민 30년에 외로움에 진저리를 치고 살았다. 외로움 부끄러움, 움자에 대한 해찰이 기막히다. 27개 움자로 끝나는 언어의 비책을 다시 다른 움자로 끝나는 반가움, 즐거움, 너그러움, 열여섯 글자의 그 따스함에… 그랬구나, 나 다움과 사람 다움으로 끝나는 글의 묘미에서 문학의 힘이 언어의 힘이 새삼 감사로움으로 포근히 젖어온다.
곡비 춘서리
곡녀로 상가집에 울음을 울어주는 여자, 이 마지막 장에서 큰 산을 만났다. 숨을 모아 온 힘을 다해 춘서리를 알아간다. 몽글몽글 송글송글 땀이 배어나오 듯 깊은 폐부에서 아직 뜨겁게 울어보지 못한 울음이 피멍 되어 목울대를 넘어오는 것 같다. 신묘하고, 구곡간장 아리고 저린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맑고 깊은 울음으로 망자를 위로하며 토해내는 봄누리의 곡비소리, 듣고 싶다. 한낱 울음 광대일 뿐인 춘서리, 그는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슬픈 비망을, 신께 닿을 수 있는 망자의 슬픔을 예술혼으로 끌어내었다.
이런 글은 누구도 쓸 수 없다, 어떤 민속학자의 곡비와 곡녀의 사전적 의미로 쓸 수 있겠으나, 장소현 선생이 아니면 끌어낼 수 없는“울음이란 본디 그런 것, 목숨 이어주는 물 같은 것”
궁궐의 국곡이 되었다가 지극한 상소로 헛울음을 울 수 없음을 고백하고 떠나는 봄눈이 이야기는 책장을 덮고 나의 설음에 울음이 터졌다. 내가 봄눈이가 되어 막힌 울음이 봇물 터지듯 방안 질펀하다.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함이 이 밤 이 글을 만나 비극은 바로 한 사람의 죽음, 그것도 서인의 죽음 앞에서만 애처로운 속울음이 나오는 곡비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철조망 바이러스>의 후기는 사물놀이에 비유하고 싶다. 사물 악기는 북, 장구, 징, 꽹과리, 이 네 가지가 어울려 우리 조상들의 삶과 놀이가 자연과 하나되는 최고의 경지를 이끌어 낸다.
장소현의 글은 사물놀이패들의 한바탕 놀이이다. 사물이 서로 하나의 울림으로 모아져 조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본래 조선인의 맥박과 딱 맞아 떨어진다. 그의 어떤 작품에서도 그 바탕색은 민족의 정한이 스며 있다.
우리 이민자들은 시민권자로 귀화해도 그 뿌리의 본성은 한국인이어야 한다. 행복한 책 읽기로 들어가 웃고 즐기고, 처절한 곡녀 춘설이로 클라이맥스에서 슬픔 없는 밋밋한 날에 비극적 비감으로 오래 이 감정에 휩싸이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