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지성, 우리 시대의 스승, 진정 시대를 앞서간 분으로 존경을 받은 이어령 선생은 많은 말을 남겼다.
디지로그(digilog), 생명 자본, 축소지향의 일본인, 가위바위보론, 보자기 문화론, 지성에서 영성으로… 등등…
그가 남긴 말들은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고, 동양과 서양을 연결시키는 지혜로 가득 차 있다. 현대문명이 직면한 숱한 문제와 장벽을 극복하는 지혜가 되기도 한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저서에는 삶과 죽음 속 사랑, 용서, 종교, 과학, 꿈, 돈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지혜들로 가득하다.
더 중요한 것은 말 몇 마디로 앞서가는 게 아니라 삶 자체가 시대를 앞서가는 분이셨다는 점이다. 그는 초대 문화부 장관, 서울올림픽 준비위원장, 작가와 교수, 논설위원과 편집인을 거치며 세상을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지구인의 축제였던 서울올림픽에서 한 소년이 세계인의 눈앞에서 지구처럼 둥그런 굴렁쇠를 굴린 것도,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란 이론으로 일본에 대한 열등감이나 혐오를 넘어 이들을 해석할 힘을 얻은 것도, 일본식 표현인 노견(路肩)이‘갓길’로 바뀐 것도, 예술 하는 천재들의 보금자리인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든 것도 그가 창조한 세계다.
그는 마지막 인터뷰에서“내 육체가 사라져도 내 말과 생각이 남아 있으니, 그 만큼 더 오래 사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어령은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시대를 앞서가며 그가 남긴 말들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들의 일이다. 그가 남긴 말들을 통해 이어령의 삶과 생각을 되살펴본다.
“나는 천재가 아니야. 창조란 건 거창한 게 아니거든. 제 머리로 생각할 줄 안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 누구나 나처럼 생각하면 나처럼 될 수 있어요. 진짜라니까.”
-《이어령, 80년 생각》 중에서 -
“생명이란 것이 무언지. 저리도 모질고 아름다운 지에 대해 가슴이 뜨거워질 것이다. 소란스럽고 척박한 길바닥 그 많은 바퀴의 위협 속에서도 용케 비집고 나온 작은 생명, 그 아슬아슬한 모험 앞에서 당신의 질주는 잠시 멈출지 모른다. 마음속에서라도 말이다. 인간보다 식물을 더 사랑해서가 아니다. 하잘 것 없는 야생화가 그동안 내 굳은 살 속의 생명을 만질 수 있게 한 것이다.”
-《생명이 자본이다》 중에서 -
“내가 평생 창조, 창조 해왔잖아. 내 손에서 탄생한 우물물 한 방울이 생명의 순환을 고스란히 따랐으면 해요. 한 인간이 남겨놓은 열정 한 방울, 창조성 한 숟가락, 업적 한 그릇이 이어져서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다시 수증기가 되어 비로 내리고, 골짜기에 쏟아지고, 또 그 물 한 방울이 다시 누군가의 가슴에 작은 울림을 주면 좋겠다는 거지.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로 아름다운 일 아니겠어요?”
-《이어령, 80년 생각》 중에서 -
“한밤에 까마귀는 있고, 한밤의 까마귀는 울지만, 우리는 까마귀를 볼 수도 없고 그 울음소리를 듣지도 못해.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분명히 한밤의 까마귀는 존재한다네. 그게 운명이야. 탄생, 만남, 이별, 죽음…… 이런 것들, 만약 우리가 귀 기울여서 한밤의 까마귀 소리를 듣는다면, 그 순간 우리의 운명을 느끼는 거라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
“우리는 영원히 타인을 모르는 거야. 안다고 착각할 뿐. 내가 어머니를 아무리 사랑해도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엷은 막이 있어. 절대로 어머니는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어머니가 될 수 없어. 목숨보다 더 사랑해도 어머니와 나의 고통은 별개라네. 존재와 존재 사이에 쳐진 엷은 막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선을 떨지. ‘내가 너일 수 있는 것’처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
“아닐세.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한 커트의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 한 커트의 프레임에서 관찰이 이뤄지고, 관계가 이뤄져. 찍지 못한 것, 버렸던 것들이 나중에 다시 연결돼서 돌아오기도 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보게.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 게 있어.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야 할 수면이 분명 존재해. 나의 죽음도 같은 거야.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있어. 내가 돌아갈 곳이니까.”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
“나는 이제 너의 죽음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아. 그만큼 죽음이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야. 추상명사가 아니라 물건 이름처럼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던지면 깨질 수 있는 유리그릇 같은 아주 구상적인 명사로 죽음은 그렇게 내 앞으로 온 거야.”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중에서 -
“영화가 끝나고 the end 마크가 찍힐 때마다 나는 생각했네. 나라면 저기에 꽃봉오리를 놓을 텐데. 그러면 끝이 난 줄 알았던 그 자리에 누군가 와서 언제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을 텐데… 인생이 그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