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6 16:33

헤어질 시간 - 조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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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다가온 것 같다. 외출할 시간, 내 딴에는 조심스레 현관문을 나설 참이었는데 기미를 챈 모모는 마른 다리를 일으켜 후들거리며 일어서려다 만다. 그는 다 소모되어 꺼져버린 전구처럼 암전의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력을 다해 흐릿한 한쪽 눈을 치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멀리 가지 마, 아빠.

시력을 잃어 한 쪽 눈이 감기더니 언제부터인가 귀까지 먹었다. 부드러운 먹이를 갖다 대면 마지못해 몇 번 입에 대다가 말았다. 깊어져 가는 가을, 기온이 꾸준히 하강하듯 그도 하루가 다르게 기력을 잃어갔다.

그에게 다가간 나는 등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탐스럽던 몸은 앙상해지고 포실하던 털도 거칠어졌다. 그래, 그래. 빨리 갔다 올게.

 

열일곱 해 전, 태어난 지 한 달이 채 안 된 말티푸 한 마리를 지인으로부터 얻었다. 말티스와 푸들의 피가 섞인 잡종견이었다. 하얀 몸통에 까만 두 눈과 콧등이 유독 반짝거렸다. 등에는 곱슬곱슬한 연한 갈색이 섞여 윤기가 흐르는 모습이 눈에 들었다.

눈 속으로 파고들 것 같은 맑은 눈빛, 가슴 밑에 앙증맞게 매달린 고추를 달고 어지간히 설쳐대겠구나 싶어 이름을 모모로 지었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든 사물과 눈 맞춤을 하던 아이는 카메라 렌즈의 조리개 같은 눈을 껌벅이며 신비로운 세상의 현상들을 열심히도 찍어댔다.

환영한다. 이 세상에 온 것을. 그리고 우리에게 온 것을.

목화솜 뭉치 같은 새끼를 왼팔에 안고 나는 네발 가진 짐승과 그렇게 첫 인연을 맺었다. 팔에 안긴 아이의 가슴에서 콩닥콩닥 심장 박동이 전해져왔다. 목숨 붙은 한 생명체를 거둔다는 것은몇백 광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던 티끌 하나가 내게 다가온 것과도 같은 인연이었다.

천방지축으로 나대는 어린 새끼의 재롱을 보며 나는 딸아이의 처음을 연상했다. 생명 가진 것들의 처음은 대동소이했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어린것의 개구짐. 새끼는 한창 자라는 제 이빨의 간지러움을 닥치는 대로 물고 흔들어 대며 치악력을 키웠다. 가죽 소파 한 귀퉁이에 눈독을 들이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는 순간, 아이는 그곳에 이빨을 박았다. . 야 야 인마! 손댈 곳도 없는 작은 엉덩이에 맴매하듯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아팠을 리 없겠건마는 아이는 거실 안을 헤집고 다니며 짖어댔다.

, 그 녀석 엄살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그제야 짖어 대는 것이 아닌 아이의 울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빠가 날 때리다니!

덥석 껴안고 달래는 와중에도 나와 눈을 마주친 아이는 오랫동안 섧게도 울었다. 눈을 빤히 마주치며 우유를 받아먹던 아이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주인으로부터 매를 맞았으니 제 딴에는 섧기도 했을 것이다.

 

아이의 머리가 커지고, 주둥이도 길어지고, 가슴 밑에 달고 다니던 자존심도 수컷의 위용으로 도드라졌을 때쯤, 우리는 둘만 남았다. 집안이 갑자기 요요해졌다.

아이는 오랫동안 누나의 방을 들락거리며 기억의 체취를 찾아다녔다. 종종 뒷문 창 앞에 앞발을 모으고 앉아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던 모모는 되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 발등 위에 얼굴을 올려놓고 끙, 소리죽여 울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뒷마당에서 모모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서로 눈을 맞추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빛났다. 서로 은연중에 여물어 버린 눈짓, 인간과 축생의 경계를 알 턱이 없는 맑은 눈이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모모야, 우리 조금만 견디자.

모모는 알아들었다. 서로는 표정 하나면 충분했다. 슬픔과 기쁨, 두려움의 세 가지 표정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처럼 보였다. 모모도 나의 표정과 언어의 톤만으로도 감정의 기복을 읽었다.

그는 주인의 얼굴만 보고 살았고 주인만을 기다리며 살았다. 먼 길 다녀오는 동안에는 몇 밤을 동그랗게 말아 누워 귀만 열어놓고 지냈다.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꼬리를 흔들어 대며 폴짝, 폴짝 뛰어 안겨 온 아이는 그제야 밥을 먹고 물을 핥고 길게 잠을 잤다.

슬픔과 기쁨, 두려움만이 그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전부인 줄 알았던 나는 그에게도 외로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곗바늘이다.’

 

삶을 단순하게 살아가는 그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되지 않았다. 사랑받는 이상으로 사랑할 줄 아는 그는, 사랑을 주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존재 같았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날은 마음을 다친 날. 마음이 쳐져서 돌아온 날은 모모가 먼저 알았다. 그는 무릎 위로 뛰어올라 아빠, 왜 그래. 품 안에서 재롱을 부리고, 마음의 눈물을 닦아내기라도 하듯 분홍색 혓바닥이 기습적으로 볼을 핥았다. 모모는 오로지 한가지의 목적만 있는 듯 보였다. 그의 애정을 사랑하는 주인에게 쏟아내는 일.

사람이 모두 너 같은 심성을 가졌더라면.

모모가 내게 말했다. 좀 단순하게 살면 아무 문제 없잖아요.

꽃이 피는 것 같더니 이내 떨어졌다. 지나간 것은 다 찰나였다. 모모의 털이 윤기를 잃어가고, 내 팔뚝의 알통도 물러졌다.

 

초저녁 어름에 나는 모모를 데리고 동네 공원 벤치를 찾았다. 둘은 양옆으로 나란히 앉아 저녁놀을, 메이플 나무의 흔들리는 잎을 쳐다보았다. 작은 정원을 앞치마처럼 두른 고만고만한 주택들이 나란히 서 있는 집 앞에서는 사시사철 꽃이 피고 졌다.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는 가고, 마침내 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각은 눈에 보이는 사물 하나하나도 예사로이 보이지 않게 했다. 그야말로 중중무진(重重無盡). 모두가 얽히고설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었다. 모모도 내 옆에 앉아 멀고 가까운 곳을 두리번거렸다.

 

모모는 잠이 들었다. 저러다가 정말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지도 모를 일이다. 현관문을 열자 을씨년스런 바람이, 겨울 강바람에 흩날리는 꼬리연처럼 가파른 굴곡을 그리며 아득하고 비감하게 흘러 다녔다.

모모야, 네가 옆에 있어 주어서 나는…….

현관문 앞에 서서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모모는 지금 꿈꾸는 중이다. *

 조성환.jpg

<글쓴이 소개>

조성환은 대구에서 태어나 1982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2016<미주중앙일보> 신인공모전에 시조와 수필로 입상했다. 2022년 제24회 재외동포문학상 산문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글벗동인> 회원으로 활동하며, 동인지 <다섯나무숲> <사람 사는 세상> <아마도 어쩌면 아마도>에 작품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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