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박인환 작사, 이진섭 작곡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가을이면 즐겨 듣거나 부르는 노래가 있다. 김민기의 <가을편지>, 박인희가 노래한 <세월이 가면>,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같은 노래다
박인희의 노래로 익숙한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朴寅煥)의 시에 이진섭이 곡을 붙여서 1956년에 세상에 나왔다. 이 시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목마와 숙녀>와 함께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겠다.
명동 어느 술집에서 박인환이 시를 써서 옆에 있던 이진섭 작곡가에게 보여주자 그 자리에서 곡을 붙이고 함께 있던 나애심이 바로 불렀다고 한다. 나애심이 먼저 나가고, 나중에 온 테너 임만섭이 그 악보를 보고 다시 노래를 부르자 주위에 있던 손님들이 몰려들어 노래를 감상했다고 한다. (전설은 이렇게 전한다. 그러나, 근년 몇몇 서지 연구의 성과로 이러한 전설의 오류는 다행히 상당 부분 바로잡히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시인은 이 시를 쓴 지 일주일 후인 1956년 3월 20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죽은 동료 시인 이상(李箱)을 기린다며 사흘간 쉬지 않고 술을 마신 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전한다.
<세월이 가면>은 나애심의 첫 번째 음반 이후 여러 가수들이 각자의 스타일로 거듭 녹음해 발표했다. 1959년 현인 외에 1968년 현미, 1972년 조용필의 노래 등이 알려져 있고, 1976년 통기타 가수 박인희가 청아한 음색으로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시보다 노래로 더 잘 알려졌다.
누군들 이렇게 잊을 수 없는 애틋한 사연이 없으랴마는 시로 쓰고 곡조를 붙여 노래로 불려지니 더욱 절절함이 사무치는 것 같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라고 노래한 세 번째 연이 이 시의 백미가 아닌가 싶다.
어려운 말 하나 없이 술술 나열해 나간 행간에서 필자는 그 잊지 못하는 사람의 부재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나뭇잎처럼 떨어져 나뭇잎에 덮여 흙이 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사랑도 가고 그도 가고 추억의 쓸쓸한 노래만이 남았다. 오늘도 비오는 날이나 바람 부는 날 사람들의 촉촉한 가슴을 더욱 풍성한 감성으로 채워주는 시이며 노래이다.
박인환 시인은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1956년 3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195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이었다. 박인환은 키가 크고 수려한 외모에 멋도 부려 명동신사, 명동백작으로 불릴 만큼 당대의 최고 멋쟁이였고, 명동에서 예술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노래하며 풍류를 즐기는 또한 당대 최고의 낭만가객이었다고 전해진다.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멋진 삶을 살다간 시인이었다.
박인환은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