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리에 터전을 잡은 지가 근 50년이 되어간다. 그것도 같은 집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살았다. 이 글을 쓰면서 ‘왜 일까?’하고 처음으로 생각을 해봤다. 특별한 이유는 물론 없다. 현실 따라, 세월의 물결에 흘러, 흘러왔다고나 할까? 그렁저렁 그냥 저절로 살아진 것 같다.
맞벌이 부부로 엘에이에서 살아가던 중, 우연한 기회에 이곳 밸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친하게 지내는 식당사모님의 권유로 집을 사게 된 것이다.
“아파트도 이렇게 편하고 좋은데 집은 뭐 하러 사요?”
참으로 철딱서니 없는 소리다. 아이가 둘씩이나 딸린 엄마가….
“지금. 둘이서 직장생활 잘하고 있으니 충분히 형편은 되잖아?”
그리하여, 사모님이 등 떠밀어주신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진행이 되어 이곳 밸리에 집을 사게 되었다. 좋은 부동산 중개인을 만난 것도 사모님 덕분이었다. 그분이 마침, 밸리지역 전문이었다. 밸리라는 이름부터가 좋았다. 계곡 골짜기… 참 문학적인 단어다. 산과 나무와 꽃이 있고 거울같이 맑은 물에 작은 물고기들이 노닐며, 반들거리는 돌과 바위가 어울리는 곳… 먼저 아름다운 풍경이 머리에 그려졌다. 그리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귀에 들려오며 거기에 소풍 나온 한 가족이 정답게 둘러앉아 김밥을 먹는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렇게 인연이 되어 우리는 밸리의 엔시노라는 동네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
그땐, 회사가 좀 멀어졌다는 것뿐, 교통난이 그리 체증을 겪을 줄은 미처 생각을 못 했다. 내 회사보다는 먼저 아이들의 학교를 우선순위에 놓고 집을 구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고, 더구나 학교 바로 맞은편에 아이들을 전적으로 봐주는 데이케어가 있어 우리에겐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큰애가 2학년, 작은애가 유치원생이었다.
출근 시간의 (405) 프리웨이는 교통대란이었다. 할 수 없어 꼬불꼬불한 로우럴 캐년을 타고 다녔다. 이른 아침, 온통 초록의 산을 끼고 운전을 하는 기분은 상쾌했다. 그 꼬불꼬불하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산길이 무섭지가 않았었다.
한데, 뜻밖에도… 서너 달 후에 회사가 이곳 밸리, 우드랜드힐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구조조정 바람이 불어 방계회사끼리 합병을 한 것이었는데, 잘리기는커녕, 운 좋게도 내게는 구원의 손길이 뻗쳐진 것이다. 그것도 길이 꽉 메는 동쪽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인 서쪽이었기에 집에서 20분 거리였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참으로 묘한 일이 또 일어났다.
이사를 온 얼마 후에, 이곳 밸리 남가주한국학교에서 2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었다. 1972년, 엘에이에 남가주한국학교가 생긴 그 몇 년 후, 밸리 분교가 벤나이스 어느 교회를 빌려 막 탄생을 했을 때였다.
그러나 풀타임 직장과 토요한국학교를 병행하기가 암만해도 무리라 한참을 쉬었다가, 학교로 다시 돌아가니… 이게 웬일인가? 벤나이스에 있던 학교가 이사를 해, 바로 옆동네 타자나에 있는 포톨라 중학교로 옮겨 와 있었다. 로컬로 10분도 안 걸렸다.
아, 또 하나가 있다. 이것은 최근의 일이다.
나는 1년 전쯤부터 시니어센터인 노스릿지‘원 제네레이션’에서 라인댄스를 배우고 있었다. 지도강사가 한국분이어서 참 좋았다. 최미란, 이름도 예뻤다. 알고 보니, 이곳 밸리시니어 사역에 10년 동안 봉사를 하고 있는 분이었다.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총 망라하고 있었다. 프로그램도 다양해 밸리 노인들이 받는 혜택이 아주 많았다. 몰랐던 정보를 얻은 것만으로도 내게는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두어 달 전, 클래스가 우리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엔시노‘원 제네레이션’으로 옮긴 것이다. 시간이 늘어나, 건강체조도 겸해서 더 좋았다. 강사께서 열과 성을 다하여 어찌나 열심히 또 재미있게 가르치는지 학생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외국인도 많으며, 강사님 영어 또한 유창하다.
‘하.하.하.하.’하고 소리를 크게 지르며 박장대소를 하는 순서가 나는 참 좋다. 그 순간, 나는 활짝 핀 한 송이 꽃이 된다. 꽃이 되어 꽃잎을 한껏 팔랑거리니 엔도르핀이 절로 나와 저절로 행복해진다.
회사도, 한국학교도, 라인댄스 클래스도 우리 집 근처로 옮겨온 것, 이건 운이 좋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는 밸리 하늘에서 내 앞에 툭 떨어진 귀중한 선물이다.
편리하고 운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인생사가 아니듯, 불상사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스릿지 지진이다. 1994년 1월 17일에 발생한 지진은 규모가 진도 6.7로 60여명이 숨졌고, 8000명 이상이 다쳤다. 당시, 한참 남쪽에 위치한 우리 집에까지 여파가 크게 미쳤다. 집이 흔들리고 요란한 진동 소리가 천지를 뒤엎었었다. 집집마다 크고 작은 피해는 있었으나, 다행스럽게 인명 피해는 없었다. 내가 입은 가장 큰 피해는 뒤뜰 담벼락이 몽땅 무너진 것이었다. 물론 보험에서 다 커버가 되었다.
그래도 밸리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참 신기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에서도 밸리와 인연이 깊다. 밸리성당(현재 성요셉한인천주교회)에 나가게 되어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고, 소설가가 된 후에는 글 쓰는 분들과도 교류가 생겨 내 인생이 더 활발해졌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미주문단의 거목 고 원 시인, 송상옥 소설가도 밸리 사람들이다. 두 분 다 내게는 대스승님이시다. 고 원 시인이 가르치시던 <글마루문학회>에 나가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글쓰기를 배우기 위해 난생처음으로 입문한 단체였다. 지금은 김동찬 시인이 줌으로 강의를 하고 있는데, 글마루의 그 세월이 어연 30년이 넘었다. 또한 밸리 문인 몇몇이 그룹을 짜서 송상옥 소설가로부터 정기적으로 지도를 받은 적도 있다. 그중에서도 역시 밸리 사람인 장소현 선생님과 인연이 닿은 것이 내게는 가장 큰 행운이다.
운 좋게도 소설가 된 것이 26년 전이다. 아주 늦깎이였다. 그런데도 내가 아직까지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장 선생님 덕분이다. 세 번째 소설집을 낸 후, 2020년쯤에는 완전 필을 놓으리라 작심을 했었다. ‘이제는 그만…’하고.
처음엔 그리도 줄줄 잘 나오던 소설이었다. “문장들이 비처럼 쏟아졌다.”라는 어느 작가의 글을 떠올리며 신들린 사람처럼 써 내려갔는데, 그만 비가 뚝 그쳐버린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을 만나고 <글벗동인>이라는 그룹이 형성되고부터는 신기하게도 막혔던 소설이 이어졌다. 그동안에 나의 네 번째 소설집이 출판되었고, <글벗동인> 5인 소설집도 세 권이 나왔다. 그리고 내년에는 <글벗동인> 제4 소설집이 출간될 예정이다.
언젠가 남편에게 물은 적이 있다. 엘에이 콘도로 이사한 친구가 하도 좋다고 하기에….
“당신 나이도 있고 하니, 이제 우리도 엘에이 콘도로 이사하는 거,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운전 안 해도 되고, 넘넘 편리하고 좋대요. 길만 건너면 식당이 줄지어 있고요.”
“왜? 내 나이가 어때서?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100세 시대! 더구나 내 골프 터전이 밸리이고, 골프 친구도 다 밸리 사람들인 거 잘 알면서…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데 더 이상 편리는 무슨….”
100살까지 살면서 운전도 하고 골프도 칠 것 같은 그런 목소리다. 거기다 후배도 등장을 시킨다. 가끔은 동창 단체 골프가 먼 데서 있을 경우에는 밸리에 사는 후배가 항상 라이드를 주는 이야기이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도 밸리가 주는 혜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마운 일은 윗동네에 사는 같은 직장에 다니는 동료와 30년을 카풀을 한 사실이다. 30년이란 긴 세월을 사이좋게 한 차로 출퇴근을 한 것이다.
그리고 둘이 같이 한날한시에 정년퇴직을 했다. 퇴직을 한 후에도 둘은 골프도 같이 치고, 엘에이도 나가다니며 계속 단짝으로 지냈다.
그러나…… 영원히 단짝일 줄 알았던 친구가 몇 년 전에 그만 저 세상으로 먼저 가버렸다.
마지막으로, 밸리와의 인연에서 가장 감사하게 느껴지는 일 한 가지를 꼭 쓰고 싶다. 그것은 아이들이 밸리 집이 추억의 보금자리라면서, 어릴 적부터 내내 행복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밸리로 이사를 왔기에 좋은 분위기 속에서 자기네들이 잘 자랐다고 하여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을 했다.
밸리야! 고맙다.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