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 꿈에서 깨어나는 이상한 몽환에 사로잡힌 소설을 읽었다.
<처제집 인간풍경> 제목이 기발한 발상이다, 처용과 제우스의 집, 디아스포라이기 때문에 가능한 제목이 아닐까.? 식당 겸 막걸리를 파는 서민적 선술집 같은 곳이지만 문화 예술인들과 지식인 대학 교수, 무대와 스크린이 있는 평범하지 않은 선술집이다. 이 선술집 단골손님들의 이야기를 연작 단편으로 엮어 독자를 책의 재미에 푹 빠지게 한다.
책을 읽다 나는 그만 60~70년대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 시대의 서울은 나에게 환(煥)의 세계였다. 자유극단 단장인 이병복 선생이 경영하는 카페이자 연극무대가 있는 서울 충무로 뒷길의 <카페 떼아뜨르>. 우리는 그곳 단골손님들과 차를 나누며 연극을 관람한다. 김동훈의 일인극 <롤라 스케이터를 타는 오뚜기> 최선자의 <목소리> 등… 그때 그 시간을 불러온다. 우리는 단골손님이 되어 다음 명동 국립극장 연극을 함께 가기로 약속한다.
또 한곳 처제집 인간풍경과 너무 흡사한 집, 명동 유네스코 앞길 작은 선술집 <은성>.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공간에 막걸리잔 부딧치는 소리, 시인, 소설가, 작곡가, 화가, 그 시대의 예술인들이 북적이는 곳이다. <은성>은 가난한 예술인들은 외상술, 공짜 술로 취하게 하는 낭만파들의 아지트, 전혜린도 자살하기 전까지 이곳 단골이었다. 아스라이 멀어져간 추억을 불러와 소설에 더 함몰되었다.
서두가 너무 길었다. 책의 표지 그림은 보라색과 연두색의 조화로움이 신비로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 군상들의 밝은 표정에서 작가가 화가이기도 해서, 스토리텔링의 단순한 소설은 아닐 것 같은 피안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11편의 연작소설은 독자에게 무한 시공을 넘나들게 한다. 이 소설의 특성은 처용과 제우스를 불러와 동서양의 신화로 디아스포라 작가임을 느끼게 한다. 노래를 매개로 세계사와 정치, 현실과 맞닿는 사유와 인간사의 이야기가 실로 방대한 느낌의 단편이다.
예를 들자면, 선술집 무대에서 가수가 부르는 노래 <블로윈 인 더 윈드> 밥 딜런의 반전 노래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대화에 오른다. <말하는 벽>에서는 처제집 한 벽은 손님들이 남긴 수많은 낙서들, 무질서의 아름다움, 낙서도 예술의 한 갈래인 듯 낙서가 벽에 부딪쳐 피투성이가 되고 어쩔 수 없는 실존의 고독을 대면 하기도 한다.
“ 대표적 벽은 우리의 삼팔선”“ 독도는 우리 땅”
국외자라도 외면할 수 없는 조국의 현실 문제들이 작품 곳곳에 담겨있다.
“ 낙서란 60년대 또 하나의 벽을 뛰어넘기 위한 몸부림이다”
“ 세상에 모든 벽들은 뛰어넘기 위해 존재한다”
<은성> 술집에서 작곡했다는 박인환의 시“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절로 노래를 부르게 한다.
처용과 제우스의 등장, 신라 시대의 설화를 끌어내어 처용과 제우스의 탈춤이라니… 하회탈을 쓴 두 신화의 탈춤은 요즘 미주 작가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다. 희랍 신화의 제우스 신을 신라시대의 동해바다로 불러들이다니, 이 신랄한 상상적 만남은 바로 동서양의 맥을 이으려는 작가의 발상이 아닐까?
작가는 환경문제와 지구 온난화, 고령화시대, 종말론까지 심각한 문제를 이끌어낸다. 작가는 팝 음악과 현대사의 문제들을 연결시켜 <이매진>의 노래로 이라크 전쟁에 미국과 한국도 참전했던 심각한 전시의 이야기를 펼친다. 이 작품은 흥미 아닌 총체적 예술성과 시대적 기조를 함께 이루는 질과 폭이 넓은 연작소설이다.
연작소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들이 메르세데스 소사의 노래 <그라시아스 알라비다>, 아르헨티나 국민가수의 노래로 시작되는 군사정권에 정면으로 싸워 체포된 망명 가수가 왜 등장할까?
선술집 주인을 월남전 맹호부대 참전용사로 설정, 전쟁의 참담함을 쓸쓸한 목소리로 세월의 흔적이 이끼처럼 끼어있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연작 9편의 제목 <견딜 수 없는 시간의 동굴> 독자도 그 견딜 수 없는 시간을 체험하게 한다. 단 이 한 구절로“내게서 해가 지지 않게 해줘요”
처제집 혼례식은 혼인 잔치에 온 예수님을 상상한다. 선술집 주인은 단골손님들을 위해서 모든 음식을 무료로 나눈다. 아! 이 이기적인 시대에 인간미 넘치는 풍경에 나도 모르게 그곳 축객이 되어 혼인을 위한 축시를 낭독하게 한다.
11편 마지막 <죽어도 살아있는>. 이제 처제집은 재개발 사업으로 문을 닫게 된다. 단골손님들은 이 건물이 허물기 전에 제사를 지내자며 십시일반 돈을 내고, 전라남도 출신 무명가수가“우리 다 같이 다시래기를 하는 게 어때요?”라고 제안한다. 아! 놀랍다. 작가의 유전자에 확실히 민족혼이 스며있다. 다시래기는 전라남도 진도의 장례 풍습이다.
처제집 단골손님들은 죽어도 살아있는 이 축제 같은 장례 놀이 다시래기로 처제집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처제집은 죽어도 다시 살아있다는 마무리다.
연작으로 펴낸 이 소설집, 작가의 숙성된 예술의 총체를 끌어내어 과거와 현재(후쿠시마 오염수 문제) 월남전 고엽제, 벽의 낙서, 카프카와 까뮈, 노래와 춤, 아날로그적 정서를 추억으로 불러와 신명나게 정독함으로 행복한 책 읽는 여자가 되었다.
<체제집 인간풍경>의 만화경으로 그려진 이 소설 마지막 다시래기 멋진 장례식에 하객으로 떠나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