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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미학

 
채 효 기 목사  <밸리 하나로 교회> 담임
 
   오래 전 읽었던 글 중에 [슬픔에 관하여]라는 수필이 있었다. 그 글에서 작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부모가 돌아가신 충격(천붕,天崩)보다 더한 극한 슬픔의 상황 속에서 깨달은 삶의 깊은 의미를 말해 주었다. 역사상의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 인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실천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슬픔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극한 슬픔 속에서 경험하는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만이 자기 속에 잠재된 사랑의 가능성을 일깨워 외부로 드러내도록 해주는 까닭이다. 
   오늘 이 세대는 결코 슬픔을 원치 않는 것 같다.‘우리를 좀 더 웃겨주시오, 우리를 좀 더 즐겁게 해주시오.’라는 말로 대변되는 시대의 요구는 걷잡을 수 없는 사치와 향락의 풍조를 낳았다. 그 속에서 나는 ‘좀 더 우리의 비참함을 가려 주시오’라고 하는 현대인의 절규를 듣는 듯하다. 그것은 인간의 비참을 위로하는 오락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비참이기 때문이다(파스칼).
   나는 김현승의 [눈물]이라는 시를 좋아한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지으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시인의 통찰력은 내게 나무의 절정인줄 알았던 꽃이 지고 나서 비로소 열매가 맺히듯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웃음과 기쁨보다는 오히려 슬픔의 깊은 차원에 있으며, 그것은 곧 신의 선물임을 가르쳐 주었다. 
역사상 결코 잊을 수 없는 슬픔의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의 생은 태어나던 순간부터 슬픔이었는데 그의 부모는 장소를 구하지 못해 초라한 마구간에서 그를 낳았다. 자라면서도 그는 처녀의 몸에서 탄생했다 해서 수많은 사람의 놀림감이 되었다. 형제도 부모도 친척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그는 언제나 홀로였다. 자라서는 그와 뜻을 같이하는 열 두 명을 제자로 삼아 사랑을 쏟지마는 결국 그들 중 하나의 배반으로 인해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나사렛 예수, 그는 철저히 슬픔의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울었다. 성서에는 예수가 웃었다는 기록이 없는 반면 그가 울었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예수는 자기의 사랑을 거절하는 성(城)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배반당한 사랑의 아픔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셨다(눅19:41). 그리고는 기꺼이 십자가의 아픔을 당하셨다. 
   누구나 자기 사랑의 감정을 받아주지 않는 대상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일진데... 이처럼 슬픔으로 점철된 생 속에서 그는 인간 영혼의 깊이를 깨달았고 결국 고뇌 속에서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여 약한 인간의 [영원한 사랑의 동반자]가 된 것이 아닐까. 랍비 카바라가 천국으로 가는 모든 문이 닫혔을 때 오직 한 문, 밥 하디못(bab hadimot) 즉 눈물의 문만이 남아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 본다. 
   인간의 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수많은 오락과 쾌락의 도구들로 우리를 웃게 하려고 하는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잠시 동안이나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가려보려는 현대문화의 일상성 속에서 벗어나 이제 나는 진정한 슬픔을, 눈물을 연습할 것이다. 그 속에서 극복을 위한 좀 더 견실한 방법을 추구할 것이다. 이것이 참 신앙이 요구하는 ‘책임적 자아’ 형성으로 향해 가는 길이 아닐까?
   나는 [눈물 속에서 주님을 만났네]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그렇다. 실로 인간은 슬픔의 심연에서 정화된 맑은 영혼(아리스토텔레스)으로만 영원한 그리스도의 이상과 만나는 것이다. 
[슬픔에 관하여]의 마지막 구절을 기억해 본다. 
“신이여, 거듭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내 영혼을 정화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