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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밸리코리언뉴스>는 신년 기획으로 아름다운 사람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조금이라도 건강하고 좋은 세상을 꿈꾸며…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는 세상이 어지럽고 어두울수록 한층 빛납니다. 그분들의 삶은 짙은 감동으로 우리 마음을 적셔줍니다. 머리 숙이게 되고 닮고 싶어지지요. 그러는 동안 우리들 마음이 조금은 맑아질 겁니다.

  아름다운 어른이 한 분이라도 더 많아질수록 세상이 맑고 향기롭고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 첫 어른으로 장기려 박사의 삶을 함께 살펴봅니다.

  계엄령이 함부로 선포되어 세상을 뒤흔들고, 의사들과 정부 당국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서, 의료 분쟁의 소용돌이로 어지러운 고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장기려 박사 같은 큰 어른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편집자>  

 

   존경받는 바보의사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

  성산(聖山) 장기려 박사(1911-1995)를 세상은 이렇게 칭송하며 존경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런 칭찬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바보의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말을 반가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항상 환자를 위해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겠다.”

  장기려 박사의 말입니다. 그는 이 말을 평생 실천했습니다.

  “제가 밤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집으로 가세요.”

  “집으로 돌아가 푹 쉬고, 혹시 몸이 안 좋으면, 돈이 없어도 꼭 다시 진료를 받으러 오세요”

  장기려 박사는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밤에 몰래 뒷문으로 내보내 집으로 보낸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사비까지 털어가며 환자를 돌본 장기려 박사가 영양실조 환자에게 써준 처방전은 이렇습니다.

  “이 환자에게는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원장

 

   무소유의 청빈한 삶

  서울대, 부산대 의대 교수, 부산 복음병원 원장을 지냈지만,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는 방 한 칸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집도 없이 병원에서 제공하는 비좁은 옥탑방에 거주하는 청빈한 삶을 살면서도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집 한 채 없는 상황에서도“나는 아직 가진 게 너무 많다”고 고백했던 장기려 박사는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가난하고 헐벗은 불쌍한 환자들의 의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65년간 지켰습니다. 뇌경색으로 반신이 마비될 때까지도 무의촌 진료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겸손한 삶을 사셨던 분, 그는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사셨습니다. 주님과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했고,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외과의로 우뚝 서다

  장기려 박사는 의사로서 실력도 출중했고, 사명감도 넘쳤습니다.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백인제 교수의 제자가 되어 외과의로 이름을 날렸지요.

  장 박사는 1943년 국내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에서 암 조직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을 정도로 외과의로서 수술 실력이 탁월했습니다. 특히나 1940년대 미개척 분야였던‘간’수술 성공은 그의 외과수술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입니다. 이는 당시 우리보다 의료 여건이 앞섰던 일본에서도 불가능했던 수술입니다.

  스승이었던 백인제 교수는 장기려 박사를 매우 아껴, 자신의 뒤를 이어 경성의전 외과학교실에 교수로 재직하기를 바랐지만, 장기려 박사는 환자를 돌보기 위해 평양에 있는 기독교 병원인 <기홀병원> 근무를 선택했습니다.

 

   복음병원 설립, 무료진료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한 교회 창고를 빌려 간이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쟁 부상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시작한 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병원은 훗날 오늘날의 고신대학교복음병원이 됩니다.

  천막 3개로 시작했던 병원이었지만, 유엔군으로부터 원조받은 약을 가지고 무료로 피란민들을 돌봤는데, 무료로 치료해준다는 소문이 나면서 하루 평균 200명이 넘는 환자가 몰려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안정되며 무료 진료는 끝이 났지만, 장기려 박사의 진료는 돈이 목적이 아닌‘사람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동족상잔의 아픔과 생이별

  1945년, 꿈에도 그리던 해방! 이제는 기쁨과 행복만 가득할 줄 알았지만,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에 나라는 반으로 찢어져 버렸지요. 

  장기려 박사는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부임할 때“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먼저 기도하고 시작했습니다. 그는 출중한 의료 능력을 인정받아 공산당으로부터 많은 배려를 받아, 그가 원한대로 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허가받았고 수술 전에 기도하고 집도하는 것도 용인됐다고 합니다. 

  그는 철저히 청지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평생 주님만을 섬기며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6.25 전쟁 기간 중 결국 월남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군했다가 철수하는 과정에서 황급히 국군에 합류해 대한민국으로 오게 된 것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장기려 박사와 얼떨결에 따라온 차남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남쪽으로 피란하지 못했습니다. 한순간에 차남을 제외한 아내와 4명의 자녀들과는 생이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극한 아내 사랑

  장기려 박사의 아내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널리 알려져있지요.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혼의 사랑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평생을 가족과 함께 피란하지 못했다는 후회를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일평생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에게 재혼을 권했지만 재혼하지 않았고, 45년간 북한에 남겨두고 온 아내와 네 자녀들을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나는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잠시 혼자 살겠습니다!”

  그가 부인을 그리며 1990년에 쓴 망향 편지는 가슴을 에이는듯 합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보니 그저 캄캄한 어두움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특권을 거부하다

  미국에서, 북한을 많이 도운 그의 제자가 북한 당국과 합의하여 중국에서 장기려 박사 부인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사양하였습니다. 

  “그런 특권을 누리면 다른 이산가족들의 슬픔이 더 커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는 결국 빛바랜 사진을 보면서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건강보험의 기틀 마련

  장기려 박사의 유산 중 단연 으뜸은 건강보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국민건강보험 정착에는 장기려 박사의 노력이 숨어 있는 겁니다.

  전쟁이 끝난 후 사회와 경제는 안정을 찾았지만, 그럼에도 의료비용은 여전히 일반서민에게 큰 부담이어서, 당시 신문기사에는 극빈 환자들이 치료비를 안 내기 위해 병든 몸으로 죄수가 탈옥하듯 병원을 탈출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릴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의료보험은 꼭 필요한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1959년부터 의료보험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법을 제정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민간 차원의 의료보험 조합이 조직됐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러던 중 장기려 박사를 필두로 부산의 23개 교회가 힘을 합쳐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가난한 환자들을 돕기 시작한 겁니다. 1968년 당시 100원 하는 담뱃값보다도 적은 60원의 월 보험료로 20만 명의 영세민 조합원에게 의료 혜택을 베풀었습니다. 이 일은 1989년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이 확대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국가보다 10년이나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이었던 겁니다.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이 한국 의료보험의 정착과 의료 공공성 제고에 기여한 업적이 인정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도 의료보험의 시작을 1968년 부산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의 창립부터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장기려 박사의 헌신은 사회에서도 인정돼 1961년 대학의학협회 학술상, 1979년 라몬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했고, 199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주를 섬기면서 살다간 사람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했고, 자신이 칭송받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평생을 오직 주님을 높이고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에 향년 85세를 일기로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성탄절에…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은… 

  “내가 죽거든 나의 비문에는‘주를 섬기면서 살다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

  장기려 박사처럼 그렇게 바보처럼 사는 위인이 많기를 바랍니다. 그런 아름다운 어른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향기로워질 겁니다.

 

장기려.jpg

장기려박사

 

 

  <덧붙이는 말> 이 글은 장기려 박사를 다룬 책과 신문, 잡지의 기사를 간추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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